"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대한민국 13대 대통령 노태우

노태우는 누구인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대표(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  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신군부 핵심 세력으로 한국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전두환 정권의 2인자에 오르며 당시 여당인 민정당 대표를 거쳐 13대 대통령으로 권력의 1인자에 올랐다.

 

노 전 대통령은 민정당 대표 시절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전격 도입했고, 5공 청문회를 개최하는 등 일정부분 민주화 진전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퇴임 후 천문학적 액수의 비자금이 드러났고, 12·12 군사쿠데타,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으로 옥살이를 하는 등 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또한 작지 않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88년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어려웠던 유년시절…‘하나회’ 결성 후 승승장구

 

노 전 대통령은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씨의 장남으로 1932년 대구 공산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교통사고(1939년)로 떠나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공산소학교(현 대구공산초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한국전쟁 때 학도병에 징집되었고, 다음해인 1951년 10월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학하며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노 전 대통령은 육사 진학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사관생도 시절 전두환(11, 12대 대통령), 정호용(전 육군참모총장) 생도와 친분을 쌓았다. 훗날 이들과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만들게 된다.

 

노 전 대통령은 육군보병학교, 육군정보학교를 거친 뒤 1959년 동기 전두환 대위 등과 함께 미국 노스캐롤리나주에서 심리전학교와 특수전학교 과정을 이수했다. 귀국 후 육사 11기 동기들과 함께 군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해 활동하게 된다. 그는 유신시절인 1976년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를 거쳐, 1978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승승장구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왔다. 최근 병세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에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눈을 감았다. 사진은 1991년 노태우 대통령이 UN헌장 의무수락 선언서에 서명을 하는 모습.   뉴시스

◆12·12사태 이후 정치인으로

 

노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되자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함께 12월12일 최규하 대통령 승인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장태환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며 쿠데타를 단행, 군부를 장악했다. 쿠데타 성공 후 수도경비사령관을 맡은 노 전 대통령은 1980년 5월17일에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주장, 자정부터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이같은 조치는 다음날 광주에 계엄군을 투입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보안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았다.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들어온 시기는 1981년 7월 육군대장 진급 후 예편하면서다. 그는 곧바로 민주정의당 당무위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전두환정권에서 정무 제2장관과 남북고위급회담 수석대표,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대한체육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정권 2인자 수업을 받았다.

 

◆단숨에 여당 대표에서 대통령으로 선출

 

노 전 대통령은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 민정당 전국구(현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당 대표위원으로 임명됐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정권은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4·13 호헌 조치를 단행했다. 전두환정권은 정권이양 계획을 밝혔지만 민주화 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등을 담은 시국수습방안인 6·29 선언을 발표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는 메시지로 승부를 걸었다. 신군부 출신이자 군사정권의 수혜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거 전략이었다.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은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 간 단일화가 결렬돼 분열된 상태로 대선에 임했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36.6%를 얻어 13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와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각각 28.0%, 27.0%로 낙선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왔다. 최근 병세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에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눈을 감았다. 사진은 1989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교황 요한바오로2세 방한 행사에 참석한 모습.   뉴시스

◆북방외교…공산주의 국가들과 관계개선 성과

 

노 전 대통령은 취임 후 북방 외교 정책을 내세웠다. 노태우정부의 외교정책은 여야를 떠나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항목이다. 노태우정부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1990년 소련에 이어 1992년에는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을 만나 수교를 맺었다.

 

대북정책에 있어서는 1988년 7·7선언으로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고, 다음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에 이어 1990년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또 임기 중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으로 이어졌다.

 

◆5공 청산과 3당 합당

 

1988년 2월25일 노태우정부가 출범한 뒤 치러진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들어섰다. 야당의 5공화국 청산 요구에 노태우정부가 계속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는 5공 인사들을 대부분 자진 사퇴시켰지만 5·18 관련자에 대한 처벌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11월에 열린 국회 5공 청문회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신군부의 폭력 진압과 전두환 정권의 비자금 등 그동안 감춰졌던 비리가 드러났지만, 광주시민들에게 발표명령을 내린 책임자를 규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회로 인한 정권의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자 1990년 민주당, 공화당과 3당 합당을 통해 여대야소 정국으로 국면을 바꿨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퇴임 후…구속 수감과 건강 악화

 

노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 김영삼 대표에게 대권 바통을 넘겼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김 대표를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은 훗날 언론인터뷰를 통해 “김 대표는 권력투사처럼 행동했고, 그의 국정운영 능력을 의심했으나 달리 대안이 없어 후계자로 만들게 됐다”고 회고했다.

 

14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단행(1993년)은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은닉 의혹이 세상에 드러나는 단초가 됐다. 민주당 박계동 의원은 1995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예치된 110억원 계좌 조회표를 제시하며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억원설’을 폭로했다. 검찰의 수사로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났고, 결국 노 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재임 기간 중 5000억원을 기업으로부터 받았고 1700억원이 남았다”고 고백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비자금 수수와 뇌물조성 혐의 등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수감됐다. 이후 항소심을 통해 징역 15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으로 감형됐다.

1993년 2월 25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노태우, 전두환, 최규하 전 대통령과 3부요인, 외국경축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신한국 창조”를 주제로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을 갖고 노태우 전 대통령과 손을 잡고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5·18 특별법은 노 전 대통령의 과거 치부가 드러나는 또 다른 계기가 됐다.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광주 5·18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진행된 것이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비자금 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거공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을 구속시킨 김영삼정부가 단행한 1997년 특별사면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석방됐다.

 

노 전 대통령은 자유의 몸을 얻었지만 이미 건강은 약해진 상황이었다. 그는 사면 후 건강 악화로 대외적은 활동을 자제해왔다. 2008년에는 동생과 조카 명의의 회사가 자신의 비자금으로 설립됐다며 소송을 진행했지만 패소했다. 그해 2월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불참할 만큼 건강은 크게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에는 노 전 대통령의 기관지에 침이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13년 6월 추징금 2628억원 가운데 미납된 231억원을 자신의 동생과 사돈 등이 완납하는 조건으로 소송을 취하하기로 하는 등 그에게 남은 마지막 숙제를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