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본질은 객관적인 사실을 탐구하는 것이고, 외교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관계를 다루는 영역이다. 이같이 상이한 두 분야가 융합돼 과학기술외교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산업을 중심으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기술패권이 화두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몇 년 전부터 반복돼 왔다. 일본이 불화수소에 대한 수출을 제한하면서 우리나라가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코로나19가 전 세계적 감염병이 되면서 백신 개발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지금 미·중 반도체 갈등도 화웨이 5세대 이동통신(5G) 장비 관련 미국의 부품 수출제한이라는 전조 현상이 있었다. 2000년대 들어 미국·소련의 냉전이 무너지고 사람과 자본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세계화가 급격히 진행돼 왔으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등 전 세계적인 경제적 충격이 반복되면서 세계화 반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기술패권 경쟁이 일시적이라기보다 당분간 지속될 트렌드이기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을 보자. 미국은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굵직한 경제대책을 발표해 왔다. 그중 하나가 올해 5월 발표된 ‘혁신경쟁법’이다. 혁신경쟁법은 반도체 및 개방형 무선접속망 개발을 위한 긴급 추가예산 투입, 인공지능(AI)·양자컴퓨팅·로봇공학·바이오·사이버보안·미래에너지 등 첨단 분야 연구개발 1200억달러 투자, 동맹국과 연대 강화를 통한 중국 견제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혁신경쟁법은 개별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기존 방식을 벗어나 보다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이에 중국에 대한 범부처 대응을 위해 국무부에 기술협력국이 설치됐으며, 미국 최대 연구개발 지원 기관인 과학재단(NSF)에도 기술혁신부를 신설했다.
중국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제14차 5개년 규획을 통해 혁신을 이루고 있는데, 2025년까지 연구개발 지출을 매년 7%씩 확대하고 기업의 기초연구 투자를 매년 8% 이상씩 늘리고 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디스플레이·배터리 등 분야에서는 중국이 비교우위를 점하고, 심해탐사·슈퍼컴퓨팅 등 일부 기초과학 분야에서도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특히 AI, 자율주행자동차 등 디지털 혁신 분야에서는 규제개혁을 통해 비약적 발전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