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과 죽음, 그 사이 살아나감. 출애굽의 여정을 시작으로, 춤추고 노래하고 배우고 사랑하는 인간 삶의 감격의 장면들이 가로 4미터, 세로 3미터의 거대한 화면에 가득 그려졌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마법이 고통의 순간도 지나고 나면 추억의 빛으로 채색하듯이, 필름처럼 스쳐지나간 삶의 자리마다 희망과 긍정의 푸른 빛으로 채색됬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긴 시간을 산 20세기 대표 화가 마르크 샤갈의 작품 ‘La Vie’(라 비에)다. 우리말로 ‘삶’, ‘인생’이란 의미다.
1960년대 프랑스 최고의 미술품 컬렉터였던 에메 매그, 마르그리트 매그 부부는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의 제안으로 프랑스 최초의 사립미술기관 매그재단을 건립한다. 매그 부부는 재단을 세우며 ‘샤갈의 방’을 만들고 새 작품을 부탁한다. 샤갈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인생의 환희의 순간을 대형 캔버스에 담아 작품을 제작했다. 매그재단은 조르주 브라크, 알렉산더 칼더,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20세기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거장의 작품 약 1만3000점을 소장한 유수의 기관이 된다. 그 가운데서도 ‘샤갈의 방’ 중심에 걸렸다는 이 작품은 ‘매그재단의 심장’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다.
이 작품이 처음으로 유럽 밖으로 나왔다.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모던 라이프’ 전시를 위해서다. 프랑스 국보인 이 작품은 프랑스 문화부 허가를 받아 국외 반출됐다. 6·25전쟁 휴전 상태,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국가로 분류되는 우리나라에 들여오기 위해서는 거액의 보험금이 들었다. 총 4억원에 달하는 전시 작품에 매겨진 전체 보험료 중 ‘La Vie’ 한 작품이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게 미술관 측 설명이다.
대구 수성구에 위치한 대구미술관의 ‘모던 라이프’ 전은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관심이 뜨거운 전시다. 대구미술관이 설립 10주년을 맞아 2년 준비 끝에 매그재단과 공동으로 선보이는 야심찬 기획전이다. 이미 입소문을 타고 관람객이 줄을 잇고 있다. 최은주 대구미술관장에 따르면 일 방문객은 최근 종료된 이건희컬렉션 기증품 전시보다 더 많다고 한다. 이건희 컬렉션 전시 때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입장 인원이 제한됐던 이유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만큼 관람객 호응이 뜨거울 줄 몰랐다는 반응이다.
전시는 대구미술관 소장품 69점, 프랑그 매그재단 소장품 75점, 총 144점을 모더니티라는 하나의 맥락 속에 혼합해 풀어낸다. 참여 작가 명단에는 한국 작가 곽인식, 곽훈, 김기린, 김창열, 박서보, 서세옥, 송현숙, 유영국, 윤형근, 이강소, 이건용, 이배, 이우환, 이응노, 최민화, 최병소, 한묵 등. 매그재단 작품의 작가는 샤갈과 호안 미로, 안나 에바 베르그만, 장 뒤뷔페,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스 아르퉁, 앙리 미쇼, 조앤 미첼, 샘 프랜시스 등 거장의 이름이 78명에 달한다.
가령 서세옥이 그러낸 수묵의 사람들에 천천히 젖어들고 옆으로 고개만 돌리면, 샤갈이 그려낸 삶의 감격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두 기관, 두 미술계의 만남이 호사스러운 광경임은 물론이고, 시공을 초월한 두 문화권의 예술가들이 지향한 바가 겹치고 교차하면서 닮은 듯 다른 모습을 보며 예술이 가진 근원적인 힘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전시는 모더니티의 다양한 측면 중 ‘탈 형상화’, ‘풍경-기억’, ‘추상’, ‘글’, ‘초현대적 고독’, ‘평면으로의 귀환’, ‘재신비화된 세상’, ‘기원’을 키워드로 명작들을 꿰어냈다. 모더니즘이라는 이론적 설득을 위한 기획은 아니다. 모더니즘 인식 기저에 깔린 미래에 대한 낙관, 모더니즘 형성의 과정에 깔린 희망과 기대의 감각을 공유하자는 취지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올리비에 들라발라드 객원 큐레이터는 전시를 계기로 쓴 글에서 “담론 속에 갇혀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경로들, 덤불 숲길, 산책을 제안하려는 마음”이라고 소개했다. 대구미술관 측은 “각 시대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맞서며 아픔과 고통조차도 예술로 승화시킨 거장들의 작품이 팬데믹으로 인한 이 사회의 무거운 공기를 환원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 초입 ‘탈 형상화’에서 만나는 자코메티의 청동 입상에서는 문명의 발전 속에서도 전쟁을 겪고 좌절하고 비틀거리는 인간의 비통함이, 풍경화에서 추상화로까지 다다른 역사 속에는 형태라는 껍데기 속 본질을 추구한 치열함이 담겼다. 다시 고독과 기원을 말하는 전시 후반부에서는 생명에 대한 찬양,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말한다.
통상 두 문화권, 두 기관의 전시가 성사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프랑스처럼 예술에 대한 드높은 자존심을 가진 나라나 기관은 더욱 그렇다. 국내 큐레이터들은 “섞이고 싶지 않다”는 노골적인 말도 듣는다. 이번엔 양 기관 협력 전시가 성사된 것을 보면서 미술관 관계자들도 한국 미술 위상이 달라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관람객에게는 문화적 자부심이 자연스레 전해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에는 전혀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들도 소개된다. 브람 반 벨데, 파블로 팔라수엘로, 에두아르도 칠리다 등이다.
전시에 나온 모든 작품들의 추정가를 합하면 9700억원 정도 된다는 설명이다. 두 미술계의 어우러짐은 단순한 액수의 총합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관람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내년 3월 2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