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문인인 추사 김정희는 추사체로 불리는 글씨와 그림, 시와 산문으로 유명하지만 뛰어난 금석학자이기도 했다. ‘철종실록’에 기록된 그의 졸기(卒記)에는 “금석문(金石文)과 도사(圖史)에 깊이 통달해 초서·해서·전서·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며 “젊은 나이에는 영명(英名)을 드날렸으나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귀양가서 온갖 풍상을 다 겪었으니, 세상에 쓰이고 혹은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고 또는 물러갔음을 세상에서 간혹 송나라의 소식(蘇軾)에 견주었다”고 했다. 권력에 밉보여 수난을 당했다는 말이다.
오랜 세월 잊혀졌던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를 역사의 전면에 다시 세운 이가 추사다. 1816년 친구 김경연과 북한산 승가사에 갔다가 이 비를 발견해 진흥왕순수비로 확정했다. 그의 시문집 ‘완당전집’에는 “신라 진흥왕순수비는 지금 경도(京都)의 북쪽으로 20리쯤 되는 북한산 승가사 곁의 비봉 위에 있다. … 비문은 모두 12행인데 글자가 모호하여 매행마다 몇 자씩인지를 분별할 수가 없다”고 했다. “비의 좌측에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데 병자년(1816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언이 와서 읽었다. 정축년(1817년) 6월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고 새겼다”는 구절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