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송정역은 옛날에는 송정리역이었다. 무엇이든 옛날이 더 좋았지만 이 근처에는 옛날이 더 많이 남아 있다. 농협 창고같이 커다란 저 건물은 큰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여기서 차를 빌려 타기로 한다. ‘송정리’에서 가사문학관까지는 차로 한 시간가량이다. 교통편이 마땅치 않다. 궁리 끝에 머리에 스친 것이 쏘카다. 작은 차로라도 왕복하면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용산에서 새벽 다섯 시 오십 분 차를 탔다. 그 앞에 다섯 시 십 분 차도 있지만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요즈음 몸이 천근만근이다. 이런저런 일에 고장난 기계, 트럭에 실려 다니듯 한다. 코로나로 열하루 입원, 앞뒤로 열흘, 보름씩 아무것도 못 했다. 9월부터 모든 것이 헝클어져 버렸다.
가사체 소설에 관한 이야기라는 그런 밀린 일들의 하나다. 담양에 굉장한 분이 계셔 가사에 일생을 바친 듯하신다. 소쇄원의 담양에 메타세쿼이아길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아름다움도 이것저것 다 갖출 필요는 없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쓰듯이 완미한 아름다움을 옮겨다 놓을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다. 그런 짧은 분량의 가사일 ‘때만’ 가사는 서정적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 있으니까. 소설이라면 200자 원고지 70, 80장 분량, 아주 짧게 잡아도 50장은 돼야 이야기가 된다. 과연 ‘3·4·3·4’로 이어지는 연속체 음률로서 그 안에 구성 복잡한 소설의 변화무쌍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가사는 단지 심정을 전달하는 듯할 때도 온갖 사연을 품고 있다. 이를 일인칭 화자의 독백적 서술이나 대화체 서술로 커버하게 된다. 그런데 사연, 즉 사건은 소설적이면 소설적일수록 독백이나 대화로는 처리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 옛날에 가사 말고 소설이 생겨났겠는가.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가장 감동적인 작품은 ‘덴동어미화전가’였다. 세 번, 네 번을 개가하고도 남편을 잃고 불에 덴 아이 하나만 키우게 된 여인의 이야기를, 대학원 시절에, 지금은 소백산에서 한문공부하는 선배를 통해 알게 됐다. 가사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지금도 시골 어디에는 가사를 읊조리는 할머니들이 계시다고 한다. ‘덴동어미화전가’도 옛날이야기 같지만 20세기 초에나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거기 나오는 사건의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경제적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봄날 화전놀이 간 아낙네들 사이에서 청춘과부 된 여인이 신세한탄을 하자 덴동어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이 여인의 삶에 서린, 삶이라는 것 자체의 원리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삶은 기쁘고 즐거울 때는 잠시, 대부분은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으로 점철돼 있다. 이것이 덴동어미화전가의 뜻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