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는 중국 영화 ‘장진호’가 말레이시아 개봉을 추진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말레이시아는 인구의 5분의 1 이상이 중국계일 만큼 중국과 문화적으로 가까운 관계이지만, ‘공산주의 사상 선전을 금지한다’는 말레이시아 실정법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23일 외신에 따르면 ‘장진호’를 말레이시아에 들여와 개봉하려던 현지 영화배급사는 최근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개봉을 불허한다’는 통지를 당국으로부터 받았다. 외신은 “애초 영화는 18일 개봉할 예정이었다“며 “하지만 ‘장진호’ 포스터가 공개된 직후 말레이시아 누리꾼들 사이에 ‘이거, 공산주의를 미화하는 선전물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고 곧 강한 반발로 이어졌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말레이시아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것이 법률로 금지돼 있다”고 소개했다.
배급사 측은 “심의 결과가 유감스럽다”며 재심 신청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장진호’가 공산주의 선전물이 아님을 명백히 입증하지 못하는 한 재심을 신청해도 통과가 어려워 결국 개봉은 어려울 전망이다.
‘장진호’는 6·25전쟁을 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도왔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의 전쟁으로 받아들이는 중국식 역사관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영화다. 6·25전쟁의 여러 전투 중 가장 치열하고 또 참혹했던 싸움으로 알려진 장진호 전투(1950년 11∼12월)를 소재로 한다.
장진호 전투의 실체는 무엇인가. 1950년 11월 두만강을 향해 북진하던 미 해병대는 함경남도 개마고원 남쪽 장진호 일대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기습을 받는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 사실 자체를 몰랐던 미군은 영하 30도 안팎의 혹한 속에서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중공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일단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장진호에서 바닷가 흥남까지 이동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곧장 흥남철수작전에 돌입했다. 한·미 양국의 역사가들은 “장진호 전투 당시 미 해병대가 엄청난 희생을 치러가며 중공군 진격을 저지하지 않았다면 흥남철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문재인 현 대통령의 부모가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국 화물선을 타고 탈출한 피란민이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이 만든 영화 ‘장진호’는 애국주의와 반미(反美)의 기치 아래 장진호 전투의 객관적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다. 먼저 38선을 넘어 남침을 한 쪽은 엄연히 북한인데 영화는 마치 미국이 제국주의 야욕에 부풀어 북한을 침공한 것처럼 묘사한다. 남북한 간 내전 성격에 가까운 6·25전쟁을 마치 미국과 중국의 전쟁인 양 묘사한 점도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미·중 갈등 격화 속에 관객이 몰리면서 중국 영화 역대 흥행작 순위 1위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문화국가인데 중국계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23%에 이른다. 중국인들은 19세기 말레이시아 주석 광산 노동자, 도로 및 철도 공사 노동자 등으로 유입하기 시작해 오늘날 말레이시아 경제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중국과 밀접한 관계인 말레이시아조차 ‘장진호’ 개봉을 불허한 것은 이 영화가 공산주의 선전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말레이시아와 달리 미국, 캐나다, 호주, 싱가포르 등에선 ‘장진호’가 상영 중이다. 유럽의 영국, 아일랜드 등도 이 영화 수입을 확정지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