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가 남긴 진실은?… 법의학 퍼즐 맞추기

숨진 아내 차에 몰래 싣고 국경 넘어온 노인
부검으로 “불의의 사고” 증명… 무죄 밝혀져
15년간 3000여건 시신 검사한 법의학자
인상적이고 비극적인 12개 이야기 소개

“산 자는 거짓 말하고 죽은 자는 진실 말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 법의학의 역할 그려내
사람들은 보통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맞는 평화로운 죽음을 떠올리지만, 10명 중 1명은 미처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사진은 대표적인 법의학 수사극 ‘본즈’의 포스터. 세계일보 자료사진

죽은 자가 말할 때/클라아스 부쉬만/박은결 옮김/웨일북/1만5000원

 

한겨울임에도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2월31일 밤, 베를린 헬러스도르프의 조립식 아파트 주차장. 고령의 하인츠 크뤼거는 자신의 차 안에 숨진 아내 힐데 크뤼거가 있다며 딸의 전화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사건의 진상을 털어놨다.

“오늘 아침, 그냥 쓰러져버렸어요! 저는 아내를 체코에 두고 싶지 않았어요. 아내는 여기 베를린에 묻혀야 해요.”



경찰이 차 안을 살펴보니 그의 말대로 아내가 숨진 채 뒷좌석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크뤼거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연인이나 부부 사이의 폭력 사건 중 평균 네 건의 피해자는 여자였고, 부부 사이에 발생한 살인 및 살인미수 사건의 희생자 77%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고령의 아내가 아침에 갑자기 그냥 쓰러졌고, 남편은 체코가 아닌 베를린에 묻혀야 한다는 생각에 아내를 차 트렁크에 싣고 국경을 넘었다고? 몰래 시신을 차에 싣고 무려 500킬로미터를 운전했다고?

클라아스 부쉬만/박은결 옮김/웨일북/1만5000원

법의학자 클라아스 부쉬만이 경찰로부터 사건 개요를 듣고 아파트에 출동했을 때에는 크뤼거의 자동차는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아파트 앞에 세워져 있었다. 부쉬만은 법의학 연구소로 시신을 옮겨서 먼저 육안으로 검시를 진행했다.

눈에 띄는 특별한 신체 이상은 없었고, 유일하게 눈썹 위쪽에 전형적인 ‘모자 테두리’ 상처가 있었을 뿐이다. 이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지 못하고 제동이 걸리지 않은 채 땅위로 쓰러질 때 나타나는 상처였다. 더구나 상처 때문에 피가 눈에 띄지도 않았고 주변에 피가 묻지도 않았다. 이는 사후에 생긴 상처라는 의미였다.

경찰 조사에서 크뤼거는 과체중에 중증 폐질환을 앓던 아내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려 했지만 가는 길에 쓰러져 버렸다고 진술했다. 크뤼거는 혼자서 아내의 죽음과 이후 절차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딸이 있는 베를린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딸이 아내의 죽음과 관련한 모든 행정절차를 맡아서 해결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크뤼거의 진술은 일관됐고, 경찰에 출석한 딸의 이야기 역시 그의 진술과 부합했다. 경찰은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객관적으로 증명돼야 했다. 검찰은 이에 부검을 통해 답을 얻기로 결정했다.

부쉬만은 이틀 뒤 정식 부검을 했고, 다음과 같은 부검 감정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이로써 크뤼거는 아내의 죽음과 무관하다는 사실이 결국 밝혀졌다.

“심근의 절단면은 균일한 갈색을 띠며, 심장전벽과 심실중격, 심장판막 근육조직 부위에는 작은 점 형태로 희끄무레한 결합조직의 경계가 확인된다. 판막 근육의 끝부분과 심장 전벽에는 출혈이 일어나 있고, 함몰된 부위가 확산돼 있으며 부분적으로 주변부가 점토와 같은 황색으로 변한 근육조직도 확인된다. 이는 막 재발한 심근경색의 흔적이다.”

쉽게 말하면, 힐데의 심장은 오래전부터 손상돼 있었고, 언제라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사망 원인으론 심장판막 근육에서 확인된 출혈이 꼽혔다. 이것은 막 일어난 심장마비의 흔적이었다. 결론적으로 사인은 자연사.

아니, 저 사람은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어째서 계속 남자 아이들을 건드리도록 그대로 놔두는 거지? 왜 아무도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거야?

9월1일 오후, 학교에서 귀가 중이던 15세 소년 다비드는 길 건너편 슈퍼마켓에서 부스스한 행색으로 장바구니를 들고 나오던 63세의 남성 베른트를 보고 분노가 폭발했다. 두 달 전 그의 집에서 성폭력을 당했던 기억이 버튼을 누른 것처럼 되살아났던 것이다.

다비드는 상습 아동성폭력 범죄자 베른트를 뒤쫓아가서 죽인 뒤 살인죄로 기소됐다.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여론은 다비드를 상습 아동성추행범을 쓰러뜨린 영웅으로 묘사했지만, 소년은 자기 비난과 회의감으로 괴로워하며 불안하고 초조감에 압도됐다. 부쉬만은 부검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해야 했다.

“주요 소견은 오른쪽 쇄골 안쪽 3분의 1 지점 바로 아래, 발바닥으로부터 125㎝ 높이의 위치에 비스듬하게 생긴 길이 2㎝가량, 폭 0.5㎝로 벌어진 피부 절단이다….(1번 자창) 상처의 가장자리는 마르기 시작하면서 매끄럽게 경계를 짓는 것으로 보이고, 위쪽 상처의 각도는 마르는 정도로 판단하면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2번 자창은 좌폐하엽 상구역에서 끝난다… 3번 자창은 7번과 8번 갈비뼈 사이 왼쪽 견갑골 아래 안쪽 가장자리, 흉강을 파고들었다.”

풀어서 설명하면, 다비드는 이날 베른트 집에서 두꺼운 칼로 그의 흉부를 한 차례 찔렀다. 이때 베른트의 폐가 손상됐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다비드는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그를 뒤쫓아가 다시 두 번 더 찔러서 숨지게 했다는 것이다.

법정은 부쉬만의 부검 감정서를 바탕으로 다비드에게 미리 계획된 ‘모살(謀殺)’이 아니라 순간적 감정에 의한 고의적 살인인 ‘고살(故殺)’ 혐의를 적용, 유죄를 선고하고 3년 구금형을 결정했다.

책은 무려 3000여건의 시신을 부검한 독일의 대표 법의학자인 클라아스 부쉬만이 15년간 죽음을 파헤치며 마주한 가장 인상적이고 비극적이었던 12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힐데 크뤼거의 불의의 사고, 다비드의 잔혹한 범죄사건, 의문스러운 죽음 등등.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떠오르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생각하지만, 전체 사망자 가운데 8.7%는 질병 이외의 외부요인에 의해, 즉 10명 중 1명이 미처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이런 엄연한 현실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는 거짓을 말하고, 죽은 자는 오직 진실만을 말한다”는 법의학의 역할을 요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