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수입한 미국 대통령제가 ‘실패작’이라고?

세계 민주국가, 대통령제보다 내각제가 ‘대세’
“대통령제는 미국 발명품… 미국 떠나면 실패”
한국도 독재, 구속, 탄핵·파면 등 ‘오욕의 역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내각회의(우리 국무회의 해당)를 주재하며 장관 등 참석자들에게 훈시하는 모습. 국회의원들이 내각을 꾸리는 의원내각제 국가와 달리 미국에선 대통령·부통령·장관 등 내각 구성원들의 국회의원 겸직이 금지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미드보다 재미있는 미국 대선 이야기/박선춘/경인디앤피/1만6500원

 

평소 말실수를 자주 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최근 어느 자리에서 유럽 정상들과의 대화 내용을 소개하다가 “영국 존슨 총리, 독일 메르켈 총리, 프랑스 마크롱 총리… 아 참, 마크롱 대통령이죠”라고 했다. 미국 대통령이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통화하는 세계 각국 정상 중에 대통령보다 총리가 훨씬 더 많다 보니 빚어진 일이다.

 

정치에 약간의 식견만 있는 사람도 선진 민주주의 국가 대부분이 대통령제가 아닌 의원내각제 정부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을 안다. 일례로 ‘선진국 클럽’이라는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 광경을 떠올려보자.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는 미국·프랑스 단 둘뿐이다. 나머지 영국·독일·일본·캐나다·이탈리아 5개국은 총리가 국가 정상 역할을 한다. 선진국이 몰려 있는 유럽을 보면 북유럽의 스웨덴부터 남유럽의 스페인까지 거의 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한국도 일본 압제에서 벗어나 1948년 정부를 수립할 때 의원내각제 정부 형태를 전제한 헌법 초안을 만든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당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승만 박사가 혼자 우기다시피 해 대통령제로 고친 것도 유명한 일화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또 오래 생활한 이 박사에겐 미국식 대통령제가 너무나 익숙한 제도였다. “대통령이 책임지고 나라를 이끌어야지 아무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 대통령이 왜 필요한가”라고 외친 그가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그렇게 대통령제는 한국의 ‘운명’이 되었다.

 

박선춘/경인디앤피/1만6500원

‘미드보다 재미있는 미국 대선 이야기’는 미국 대통령선거에 관한 책이지만 실은 정부 형태로서 대통령제 그 자체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 의원내각제가 대세인데 어째서 미국은 대통령제를 갖게 됐는지, 그리고 미국을 따라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에 첨부된 수많은 사진, 그리고 ‘하우스 오브 카드’와 ‘웨스트윙’ 등 미국 정치를 다룬 드라마 얘기는 읽는 재미를 돋우는 ‘양념’ 같은 존재다.

 

세계적 정치학자 후안 린쯔 미 예일대 교수는 일찍이 이렇게 설파했다. “대통령제는 신흥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본질적으로 권력분립 원칙이 망가질 것이기 때문에 의원내각제보다도 헌정질서의 붕괴 위험이 더 높다. 민주적인 시민의식이나 정치문화가 결여된 국가에서는 일종의 민주주의 교착상태가 헌정질서의 위기를 불러오고, 이로 인한 군부의 개입과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를 가져온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 1948년 의원내각제 정부 형태를 골자로 한 헌법 초안을 뒤집고 대통령제를 관철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한마디로 대통령제는 ‘실패작’이란 얘기다. 실제로 만성적인 정치 불안에 시달리는 남미 국가들은 미국에서 수입한 대통령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정권이 위기를 겪다가 붕괴하곤 했다. 한국도 이 박사의 고집 탓에 대통령제를 택했다가 장기집권, 독재, 군부 쿠데타 등 숱한 헌정사의 굴곡을 경험했다. 대통령 본인이 부패에 연루돼 퇴임 후 구속되거나 임기 중 탄핵으로 쫓겨난 사례도 있다.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 2명이 모두 감옥에 있는 현실이 한국 대통령제의 초라한 성적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에 의하면 1787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헌법 제정을 위한 회의가 열리기 전까지 지구상에는 대통령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으로선 군주제 국가 영국에서 독립하려는 마당에 영국처럼 국왕을 둘 순 없었다. 영국 식민지로 있으며 가혹한 억압을 겪은 미국인들은 군주가 폭군으로 돌변할 가능성도 걱정했다. 그렇다고 국가원수 자리를 비울 수도 없어 ‘발명’해낸 제도가 바로 대통령이란 게 저자의 설명이다.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TV 토론회에서 만난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오른쪽)과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국민들의 투표에선 클린턴이 앞섰지만 대통령 간선제를 택한 미국 헌법에 따라 더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한 트럼프가 당선되는 이변이 연출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당시만 해도 영국은 지금과 같은 의원내각제가 정착하지 않았고,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은 왕정이 대세였다. ‘국왕은 군림하되 다스리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 원칙이 영국 등 유럽에 자리를 잡은 뒤 미국이 독립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국 독립의 영웅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 대신 국왕이 돼 뒤로 물러나 앉고 의회 다수당 대표가 총리로서 전권을 휘두르는 유럽 스타일의 제도가 미국에도 안착하지 않았을까.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이런 상상에 빠져들게 된다.

 

저자는 1996년 제14회 입법고시 합격 후 국회사무처에서 일해 온 입법 전문가다. 미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히는 도널드 트럼프와 최초의 부부 대통령을 노렸던 힐러리 클린턴이 맞붙어 트럼프가 이긴 2016년 대선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입법관으로 근무했다. 그 시절 워싱턴 정가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경험이 이번 책의 집필 계기가 됐다. 국회사무처 기획조정실장을 거쳐 현재 국회 국방위원회 수석전문위원(차관보급)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