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의 수장이 지난 한 해 미국 외교를 결산하는 자리에서 북한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미국 외교정책 순위에서 북한이 한참 뒤로 밀려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것으로 풀이된다. 문재인정부가 임기 말 ‘레임덕’ 속에서도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6·25전쟁 종전선언의 실현 전망이 밝지 않은 이유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21일(현지시간) 한 해를 결산하는 성격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며 전 세계에 “미국이 돌아왔다”고 선포한 지 꼭 11개월 만이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요즘 블링컨 장관의 머릿속은 온통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란 문제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굴기하는 중국에 맞서 동맹국들을 결속할 묘책을 찾느라 분주하다는 점을 보여줬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 같은 나라가 국제 시스템 약화를 추구하고 있다”며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 같은 나라의 대응에 있어 더 강력한 지정학적 위치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이 11개월 전보다 더 강력하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며 “우리는 세계에서 더 강력해졌고, 국내에서도 더 강력해졌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강력해진 근거로 블링컨 장관은 동맹과의 관계 회복을 들었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 우선주의’라는 이름 아래 동맹을 박대하면서 사이가 멀어졌던 나라들과 다시 친구가 되었다는 취지에서다. 그는 “내가 취임한 1월만 해도 동맹 및 파트너 국가들과의 관계가 몹시 긴장돼 있었고, 미국이 다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됐다”며 “미국의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전제 하에 일을 했다”고 지난 11개월을 회상했다. 그러면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EU),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등을 거론했다.
특히 미국이 얼마 전 영국·호주와 결성한 3국 안보 동맹 ‘오커스’(AUKUS), 미국·일본·호주·인도 4국 협의체 ‘쿼드’(Quad)에 큰 비중을 할애했다. 미·영이 호주에 핵추진 잠수함 건조기술을 제공하는 게 핵심인 오커스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군사력 확장을 억지하는 역할을 한다. 반도체 등 핵심 장비·기술의 공급망 단속과 우주 분야 협력 등을 내세운 쿼드 역시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목표다.
블링컨 장관은 “우크라이나와 인접국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 이란의 핵 프로그램, 국제질서에 토대를 둔 규범에 대항하려는 중국의 시도 등 거의 모든 사안에서 우리(미국)는 동맹 및 파트너 국가들과 더욱 의견일치를 봤다”고 강조했다. 중국, 러시아, 이란에 대한 대응이 현 단계에서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임을 내비친 셈이다.
이날 블링컨 장관은 북한에 관해선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북한이 미국 외교정책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이 대만해협에서 연일 대만을 상대로 무력시위를 하고, 러시아는 10만 대군을 국경에 집결시켜 우크라이나 침공을 준비하는 가운데 미국이 북한 따위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미국은 중국과 일본에 주재할 자국 대사 후보자를 진작 지명해 상원 인준까지 마쳤으나, 주한 미국대사는 현재 후보군이 누구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미 NBC 방송이 관련 보도에서 “한국으로선 매우 모욕적인 상황”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미 조야에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등이 겨루는 내년 3월 한국 대선 이후에나 주한 미국대사 후보자가 지명될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이렇게 되면 임기 말 레임덕 속에서도 문재인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6·25전쟁 종전선언은 실현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조심스럽게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