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 me, 나를 기억하는 일
2021년은 전에 없이 소란스럽고 커다란 사건이 많은 한해였다. 전염병이 사라질 줄 알았으나 사라지지 않았고, 백신으로 극복하기를 바랐지만 극복하지 못했다. 전염병에서 비롯한 아시아 혐오는 애틀랜타 총격 사건으로 이어졌으며 백신 이기주의는 변이 바이러스를 만들었다. 팬데믹의 혼란 속 미얀마에서는 군사 쿠데타에 대항해 유혈사태가 일어났고 아프간은 무장단체 탈레반이 점령했다. 카불 국제 공항에서 철조망 너머 미군에게 자식을 넘기던 부모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자신을 아는 일, 자신을 그리는 일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에 의하면 반 고흐를 기록한 사진은 한 장이 남아있다. 1886년 파리 근교 강변에서 동료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다만 흑백이며 원거리에서 촬영해 반 고흐의 외모를 세밀하게 알기는 어렵다. 오히려 반 고흐를 실물과 흡사하게 묘사한 것은 피터 러셀(John Peter Russell)의 초상화다. 반 고흐는 자기를 닮은 이 초상화에 애정을 가졌고 남동생 테오에게 다음 같이 말한 바 있다. “러셀이 그려준 내 초상화를 잘 관리해 주렴. 내게 의미 있는 그림이야.” 러셀의 초상화에 기반하면 반 고흐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고 눈동자는 초록색이었다. 하지만 반 고흐는 자화상 속에서 자기 눈동자는 푸른색 또는 회색으로 그리기도 했다. 사실적 묘사보다 회화적 실험의 측면에 집중해 작업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 고흐는 파리에서 외사촌 안톤 마우베(Anton Mauve)의 화실 등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마우베는 일찍이 헤이그에 머물며 풍경화를 그렸는데 반 고흐 역시 헤이그 등의 도시에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곧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돌아와 화숙(畵塾)에 머무르며 파리 미술계를 돌아봤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를 접했고 새로운 시도를 펼치고 싶어졌다. 반 고흐는 보고 배운 것을 그리려 모델을 기용하거나 캔버스 천을 사용하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며 기존에 작업한 캔버스 천 뒷면을 재활용해 실험을 펼치기 시작했다. 파리에 체류한 1886년부터 1888년 사이 그린 자화상은 무려 스무 점에 달한다.
‘화가로서의 자화상(Self-Portrait as a Painter)’(1886)은 1886년 파리로 돌아온 직후 작업실에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초기 자화상 중 하나인 동시에 반 고흐가 자기를 예술가로 묘사한 최초의 자화상으로 알려졌다. 여기에서 반 고흐는 재킷을 입고 모자를 쓴 채 이젤 앞에 서 있다. 그의 손에 든 팔레트는 다양한 색의 물감으로 뒤덮였다. 자세히 보면 혼합하지 않은 이제 막 물감을 덜어 놓은 상태다. 그 옆에는 물감을 희석하는 테레빈유 병과 붓이 보인다. 반 고흐의 진지한 표정은 앞으로 그려질 그림에 관한 고민의 깊이를 알게 한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Self-Portrait with a Straw Hat)’(1887)도 마찬가지로 파리에서 제작한 자화상이다. ‘만종(The Angelus)’(1857-1859) 등을 그린 밀레(Jean Francois Millet)의 영향을 받은 ‘감자 껍질 벗기는 사람’(1885)의 뒷면에 그려졌다.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1887-1888)과 모자만 다를 뿐 같은 복장을 해 당시 반 고흐의 외출 차림새를 추측하게 한다. 여기서 반 고흐는 화면 속에서 밀짚모자를 쓴 채 강렬한 눈빛으로 정면을 보며 앉아있다. 의지나 다짐이 서린 것 같은 눈빛이 압도하는 얼굴은 턱수염이 둘러쌌다. 얼굴은 무표정이지만, 남색 자켓과 주홍색의 턱수염, 그리고 화사한 배경색이 분위기를 밝게 만든다.
‘화가로서의 자화상’과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은 단 일 년의 간격을 두고 그려졌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앞의 그림이 렘브란트 풍의 전통적 회화를 따라 명암에 집중해 어두운 톤으로 그려졌다면 뒤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밝고 순수한 색 사용과 함께 보색의 효과를 드러낸다. 더불어, 앞의 그림이 여러 번의 붓질을 통해 면으로 화면을 구성했다면 뒤의 그림은 점 같은 짧은 붓질이 모여 만든 결로 형태를 드러낸다. 이 붓질의 결은 화면에 운동감을 선사해 빛 또는 공기의 흐름이 보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대상의 전통적 묘사와 색의 사용에서 벗어나 동시대 미술가로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다.
고흐는 몇 년 뒤 테오에게 자화상과 관련해 다음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사람들은 자신을 아는 일이 어렵다고 말하고 나는 그것을 믿어. 하지만 자신을 그리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야.” 자기를 아는 것도, 자기를 그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반 고흐처럼 끊임없이 자기 실험을 펼치는 일은 세상을 바꾸는 과정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새해가 되면 매번 바라는, 나은 내일을 향한 과정 중 하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