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린 목사가 있었다. 정작 그는 “노동자들이야말로 나의 스승”이라며 산업선교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것은 공장 안에 기독교인을 늘리거나,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노동자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우도록 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국 산업선교의 선구자 조지송 목사의 얘기다. 그의 삶을 다룬 평전이 3주기를 앞두고 출간됐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1958년 영등포 지역 노동자를 위한 영등포산업전도회로 출발했다. 초기 산업전도는 교세확장을 목적으로 공장을 복음화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과 인권유린 속에 산업전도는 산업선교로 전환됐다. 노동자를 선교하는 것의 본질을 노동 현장을 포함한 사회 구조와 역사를 변혁하는 데 둔 것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그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그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조 목사는 일전에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고 믿는다”며 “그런 의미에서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의 교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인간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민주주의를 배우고,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도 배울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1977년 1월3일자에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소개하며 “매달 대부분 비기독교인인 5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도움이나 지지를 받기 위해 영등포산업선교회에 찾아온다. 교회의 핵심 동력은 노동 환경의 개혁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교회는 대중투쟁과 다른 방식으로 노동문제에 접근한다”고 전했다. 조 목사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교회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지도 않아요. 나는 사람들의 문제를 듣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길을 찾을까요?’ 하고 말입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초기 활동 보고서를 보면 조 목사의 생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인간의 인격보다 자본과 기술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며, 노동자가 대학 교수나 성직자보다 낮은 계급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다. 하나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사회 속에서 실증되지 못하는 한 교회의 외침은 아무 효과도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평전을 집필한 열린 교회의 목사이자 시인인 서덕석은 ‘누군가가 조 목사에게 1970∼1980년대 산업선교가 무엇을 지향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오직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우도록 했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