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말 그때는 이명박정부서 ‘녹색성장’ 정책 내걸자 대기업들 저탄소 경영 체제 구축 약속 시작만 반짝… 전체 배출량은 되레 늘어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정부 정책보다 사회 전반 복합적 연결 장기투자자들이 기업 의사결정에 영향 달라진 환경에도 한국은 여전히 더뎌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수익 안 나면 녹색경영·녹색금융 멈춰 현행 환경정보공개제 부족한 점 많아 금융에 적합하게 관련 정보 공시돼야
문제. 다음 발언 중 시기적으로 먼저 나온 것은 몇 번일까?
1. “석탄발전을 재생에너지로 대체하여, 새로운 시장과 산업을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들겠습니다. … 화석연료 의존이 높으면서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아직 낮고,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진 우리나라로서는 더욱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 우리 사회 전 영역의 혁신을 추동하면서 저탄소 사회로의 이행에 속도를 높여야 합니다. 녹색 산업 생태계 구축을 위한 산업 혁신 전략도 보다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2. “유가와 곡물가, 원자재 값이 급등하고, 세계 금융시장도 여전히 불안합니다. … 단기적인 대책만으로는 우리 경제를 살리기에 부족합니다. …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시급하고 중요합니다. 멀리 보고 철저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 녹색 기술과 청정 에너지로 신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해야 합니다. … 올해를 저탄소 사회로 가는 원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읽은 연설문이라고 봐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똑같은 내용이다.
12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서로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1번은 2020년 문재인 대통령의 2021년도 예산안 시정연설과 국무회의 발언을 엮은 것이고, 2번은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18대 국회 시정연설과 8·15경축사의 일부다.
2000년대 말, 이명박정부가 녹색성장을 외치자 기업들은 화음을 넣듯 온실가스 감축을 다짐했다. 현대·기아차, LG전자, SK그룹 등 주요 대기업이 저마다 이산화탄소 감축, 저탄소경영체제 구축을 약속했다 요즘 철강업계에서 자주 들리는 ‘수소 환원 제철’이라는 용어도 그때 나왔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의, 중소기업중앙회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산업계 자율실천 협의체’(자율 협의체)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자율 협의체는 이후 어떤 활동을 했는지 14일 전경련 측에 물었다.
“별로 진행을 못 했습니다. 그게 (만든다고 하고) 꾸려지지는 않았어요. 일본에서 경단련 중심으로 1997년부터 비슷한 걸 만들어서 되게 잘 운영되는 게 있었거든요. 저희도 몇 년 동안 그걸(경단련의 환경자주행동계획) 벤치마킹해서 준비를 하다가 MB정부에서 녹색성장을 한다고 하니까 발표를 했는데 흐지부지됐어요. 하도 오래전 일이라 구체적인 건 잘 기억이 안 나네요.”
2010년대 말까지 기업의 배출량도, 한국 전체 배출량도 늘었다. 이명박정부의 녹색성장은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했다.
10년 가까이 흘러 데자뷔인가 싶게 비슷한 일이 다시 한 번 벌어지고 있다. 정부와 기업이 동시에 탈탄소를 이야기하는 모습이 흡사 녹색성장 시즌2를 연상시킨다.
구체적인 상황은 매우 다르다. 유승권 이노소셜랩 ESG 센터장(한양대 ESG MBA 겸임교수)은 크게 세 가지를 말한다.
“기본적으로 온실가스에 대한 심각성이 더해졌습니다. 두 번째로는 투자가 움직였다는 것이죠. 연기금과 장기투자자들이 기후 금융을 한다고 하니까 이게 기업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거래 부문을 들 수 있습니다. 환경을 악화시키는 기업이다, 라는 인식이 있으면 B2B든 B2G나 B2C든 상대를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죠. 예전에는 정부 정책에 맞춰 좋은 말만 하려고 했다면 지금은 투자, 국제거래, 일반 개인 거래 이런 게 복합적으로 연결돼 빠져나갈 틈이 없는 겁니다.”
한국 기업의 변화는 여전히 더디기만 하다.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은 “지난해 7월 유럽에서 핏포55(EU그린딜 패키지 정책)가 발표됐을 때만 해도 긴장감이 좀 있었다. 그런데 2030년 국가 감축목표(NDC)에서 산업부문 감축률이 14.5%(한국 전체 감축률은 40%임)에 그쳐 신호가 잘 안 가는 것 같다”고 했다. 환경 분야 컨설팅업체 에코앤파트너스의 이한경 대표는 “기후리스크를 재무적으로 제시한다고 해도 여전히 생산, 투자 등 핵심부서에서 외면당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업의 입장도 전했다.
“요즘 스코프3(공급망)의 온실가스 배출량까지 관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지만, 이걸 평가하고 감축 목표를 설정하는 게 회사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감축했다고 하면 그 이행성과를 어떻게 공개해야 하는지 고민인 기업이 많아요.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있었으면 합니다. 또, 기후 대응에는 위험요인과 기회요인이 둘 다 있을 텐데 기회요인을 공개하면 ‘그린워싱’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도 기업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부분입니다. 기후 리스크와 경영 성과의 상관관계 연구가 많이 추진돼야 합니다.”
기업의 선언이 보여주기에 그치지 않으려면 객관적인 공시가 잘 이뤄져야 한다. 환경 정보 같은 비재무정보 공시는 유럽연합(EU)과 미국 등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문제다. EU는 2006년부터 비재무 정보 공시를 의무화해 점차 대상 기업과 공개 범위를 넓혀왔다. 한국은 2025년까지는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자율공시를 활성화하고, 2025년부터 단계적으로 공시를 의무화하겠단 계획이다.
“객관적인 공시가 잘 되지 않으면 지속가능보고서 같은 데다 전문가 인터뷰 싣고서 ‘우리 잘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여주기가 돼버리기 쉬워요. 수치나 결과로 보여줄 수 있어야 MRV(측정·보고·검증)가 가능합니다.”(이유진 부소장)
지금도 환경정보공개제도라는 비슷한 제도가 있다. 환경부가 운영하는 이 제도는 금융권에서 사용하기에 다소 결이 다르다. 김태한 탄소공개프로젝트(CDP) 한국위원회 책임연구원은 “최근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대한 관심이 금융을 중심으로 촉발됐다는 점에 비춰보면, 관련 정보도 금융에 적합하게 공시될 필요가 있다. 현행 환경정보공개제도는 정보의 내용, 시점, 신뢰도 등에서 금융기관이 사용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며 “ESG 정보를 투자자 보호를 위한 의무재무보고서(한국은 사업보고서)를 통해 공시하는 게 세계적 추세다. 국내외 투자자 접근성이라는 측면에서도 공시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정보를 객관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당장의 지수에 매몰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유승권 센터장의 지적도 곱씹을 만하다.
“요즘 유행하는 ESG 경영에는 사실 근본 철학이 있습니다. 지속가능성이라는 거죠. 올해, 내년이 아니라 10년, 15년 뒤에도 살아남는 기업이 되려면 탈탄소로 전환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여러 단체에서 관련 데이터를 갖고 ‘ESG 인증을 주겠다, 등급을 매긴다’ 하면서 1∼2년짜리 평가에 매달리게 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지속가능이라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하는 거죠. 기업이 눈앞의 ESG 인증, 등급에 연연하게 하면 오히려 그게 그린워싱의 빌미가 될 수도 있어요.”
경제의 양 축은 생산과 소비다. 이런 의미에서 김태한 책임연구원은 소비가 주는 시그널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MB정부의 녹색성장은 정부 주도였고, 지금은 어떻게 보면 시장, 특히 금융기관이 주도하는 게 큽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찾아온 녹색경영·녹색금융 흐름이 언제 멈출 것 같으세요? 수익이 안 나면 멈추겠죠. 그렇다면 (친환경 상품에) 소비가 일어나야 합니다. 소비 주체는 정부, 기업도 있지만 개인 소비자도 있어요. 우리가 물건 살 때 가격과 품질을 따지는 것처럼 환경 측면도 일상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치소비의 일상화라고 할까요? 결국 기업은 돈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