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이번 겨울 서울을 가장 밝게 비추고 있는 장소 중 한 곳은 중구 소재의 백화점인 듯싶다. 한 백화점 본점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건물 외벽을 화려한 루미나리에로 꾸몄다. 영화 ‘위대한 쇼맨’을 모티브로 삼아 서커스 콘셉트로 제작해 전에 없이 커다란 관심이 쏠렸다. 이 루미나리에와 함께 찍은 지인들의 사진이 SNS 피드에 하루에 하나씩은 꼭 등장했다. 호응 속에 기획한 팀의 팀장은 유명 TV 프로그램에 나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V 타틀린을 위한 기념비(‘monument’ for V. Tatlin)’는 플래빈이 형광등을 사용한 대표적 작업 중 하나다. 여기 각기 다른 길이의 일곱 개 형광등이 어둠 속에 있다. 초록빛을 뿜으며 드러나는 형태는 우뚝 솟은 탑을 떠올리게 만든다. 타틀린이 제작한 ‘제3 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비’를 닮은 것 같다. 형광등에서 퍼지는 빛은 작품이 형태를 넘어서 공간으로 확장하게 만든다. 플래빈은 이렇게 공간을 채우는 빛의 효과에서 숭고함을 보았다. 이전의 미술 작품이 숭고를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담은 것으로 다루었다면, 여기서 숭고는 근대의 산물이 가져온 일상 속의 새로운 숭고다.
러시아 구축주의는 기하학적이며 추상적인 형태로 미니멀리즘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플래빈은 구축주의 작가 중 특히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의 작업에 영감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만든 공학적 형태와 예술과 기술을 결합하려는 시도에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1964년부터 1990년 사이 타틀린에 대한 모조 기념비 연작을 39점이나 만들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따르면 작가는 ‘기념비(monument)’라는 단어를 형광등의 간소성과 기념비의 견고함 간의 불일치를 인식, 반쯤 농담으로 사용했다.
#김선희, 라이트 라이츠
김선희는 빛을 재료이자 주제로 다루는 작업을 하는 동시대 작가다. 중앙대학교 공예학과를 졸업했으며 크랜브룩 미술 아카데미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했다. 뉴욕 쿠퍼 유니언 주관으로 가버너스 아일랜드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국내에서는 룬트 갤러리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메르세데스 벤츠 파이낸셜 서비스 신진 작가상을 받았으며 2021년 화랑미술제 신진 작가전 ‘줌-인’에 선정, 참가하며 이목을 모은 바 있다.
작가는 공예를 전공해 일찍부터 목공예, 금속공예 작업을 하며 도자기와 직물 등을 다루었다. 손에 무엇인가가 닿는 느낌이 좋았고 그 순간 자기와 대상 사이 소통이 이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단순히 오브제로 완성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현상학적 의미로 넓어졌다. 이러한 의미를 반영한 작업을 모색하던 중 손이 만지는 수많은 표면 중 가장 최상위의 표면은 빛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진을 부전공으로 공부하며 익힌 빛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Light Lights l Wave of Light-curve’(2021)는 2021년 자문밖 아트 레지던시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아코디언의 주름상자 같은 형태가 수려한 모습으로 펼쳐져 눈길을 사로잡는다. 곡선과 직선이 교묘하게 어우러지고 그 사이로 빛이 퍼져 나온다. 빛은 강하거나 약하지만 서로 부딪치지 않으며 공간을 은은하게 함께 채운다. 어둠을 밝히는 그 장면은 댄 플래빈의 작품같이 일상 속 새로운 숭고로, 보는 이의 순간을 멈추어 마음을 매료시킨다. 그 안에 머물고 있으면 겨울의 시림도 기억의 아픔도 모두 평안해진다.
작품에서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형태를 만든 것은 종이다. 작가는 빛을 전사시키는 재료 중 유연성을 가진 종이를 작업에 자주 활용한다. 종이는 그 크기와 재질에 따라 빛의 투과율과 그 결에 차이를 가져온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대형 크기로 인해 심지에 감겨 있던 종이가 가지게 된 형태를 그대로 두었다. 가장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놓인 종이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할 수 있는 빛의 배치를 찾으려 노력했다. 완성된 작품을 두고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상에서 인지와 표현을 돕는 빛과 종이가 요란하게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서로의 물성을 지지하며 상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을 바라보며 느꼈던 평안함의 이유는 바로 여기서 기인했을 것이다.
작가는 빛에 관한 자기 생각을 다음같이 펼쳐 놓은 적도 있다. “우리는 빛을 통해 세상을 본다. 빛은 고유의 성질대로 끊임없이 흐르다 표면 어딘가에 부딪혀 파장을 산란시킨다. 산란된 빛은 일상에 산재하지만 우리는 주로 빛 너머 각자의 목적을 본다. 빛을 보지만, 빛을 보고 있지 않기도 한 이유다. 무언가 보고 있음에도 실체를 마주하기 어려운 나의 일상들과 꼭 닮아 있기도 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모호한, 실체를 마주하기 어려운 일상은 어쩌면 작가뿐 아니라 우리가 모두 마주한 매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빛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우리를 비추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반짝이던 백화점 앞 루미나리에처럼 발견되어 위로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