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 임종운(54)씨는 글을 잘 읽지 못하지만 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그는 선거의 의미를 이해했고, 방송을 통해 접한 이미지와 주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뽑고 싶은’ 후보도 정했다. 그러나 막상 기표소에 가서는 투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글자가 빼곡히 적힌 투표용지를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표소 안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던 그는 결국 아무 곳에나 도장을 찍고 나왔다.
발달장애인 박경인(28)씨 역시 투표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적 있다. 그는 글을 읽을 수 있지만, 어려운 단어나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런 박씨에게 후보자들의 공약이 적힌 선거공보물은 난해하기 일쑤다. 함축적인 한자어와 개념어 등이 사용되거나 긴 문장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박씨는 공약을 유심히 보려고 했지만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고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첫 투표였던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지인이 뽑으라고 알려준 후보에게 무작정 투표하고 나오기도 했다. 박씨는 “장애인과 아동, 노인, 탈시설 정책 등에 관심이 많지만 어느 후보가 관련 공약을 어떻게 냈는지 알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생애 첫 투표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았던 그는 이후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제20대 대선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20만 발달장애인 유권자들의 참정권을 보장해달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글을 읽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이들 중에서도 투표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지만, 현재 투표는 ‘글’ 중심이어서 장벽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발달장애인들은 보다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선거공보물과 투표용지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쉬운 선거공보물·그림 투표용지 필요”
4일 장애인단체 등에 따르면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제29조,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7조는 ‘국가 및 지자체와 공직선거 후보자 및 정당은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장애인단체들은 발달장애인이 투표에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해 참정권 행사에 실질적인 제한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확대를 위해 거론되는 것은 그림 투표용지와 쉬운 선거공보물이다. 실제 임씨와 박씨는 지난달 28일 서울중앙지법에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물과 그림 투표용지를 제공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피고는 ‘대한민국’이다. 소송대리인을 맡은 김윤진 변호사는 “국가의 의무를 포괄적으로 지적하고자 정부에 직접 소송을 제기했다”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투표용지를 읽고 투표하기 어려운 선거권자에게 적합한 편의가 제공돼야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그림 투표용지”라며 “색깔을 사용하거나 사진 등 시각적인 이미지를 포함한다면 발달장애인도 자신이 투표하기 전까지 습득했던 다양한 정보 및 판단 기준을 활용해 투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대리인 이선민 변호사도 “현재 공약에는 ‘변곡점’, ‘체납’ 등 발달장애인이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많아 발달장애인들은 후보들이 내세우는 정책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짧고 명료한 문장과 함께 그림·사진을 포함하는 등 장애인에게 비장애인과 동등한 수준으로 관련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범 한국피플퍼스트 활동가는 “발달장애인은 투표용지를 보고 누군지도 명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원하는 후보가 있어도 못 뽑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다”며 “2018년 지방선거 때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이런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수년째 바뀐 것은 전혀 없다”고 꼬집었다.
이들의 주장처럼 그림 투표용지 등이 도입되려면 현행 공직선거법이 개정돼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은 지난해 11월 관련 내용을 담은 공직선거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한 상태다. 개정안에는 투표용지에 소속정당을 상징하는 로고와 후보자 사진을 함께 포함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다만 실제 도입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입법조사처는 그림 투표용지 도입에 우려를 표한 바 있어 국회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입법조사처는 2019년 그림 투표용지 도입 관련 질의에 “후보자의 사진이 있는지 없는지, 사진 속 후보자의 외모가 어떤가에 따라 선거 당락이 갈릴 수 있다”며 “결국 ‘이미지 선거’가 될 우려가 있다”고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실제 과거 영국의 지역공동체 위원 선거를 조사한 결과 투표용지에 인쇄된 후보자 사진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경우 당선 확률이 높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투표 보조 지원 가능해졌지만… “공적 조력인 배치 필요”
장애인단체는 장애에 대한 교육이 충분히 된 ‘공적 조력인’ 배치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후보 명단을 잘 읽더라도 손 떨림 등으로 도장을 제대로 찍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기표소에서 도장을 대신 찍어주는 등 투표를 돕는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6년부터 발달장애인의 투표 보조를 허용했지만 2020년 21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이런 규정을 삭제했다. 투표 보조인이 선거 당사자의 투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후 투표소를 찾은 발달장애인 상당수가 기표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호소가 이어졌고, 최근 보조 인력과 동행할 수 있도록 매뉴얼을 다시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이 같은 투표 보조인력 역시 법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매뉴얼 수준이어서 공직선거법에 관련 내용을 넣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관계자는 “매뉴얼에 강제성이 없어서 발달장애인이 투표 보조를 희망해도 현장에서 거부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고 제대로 교육 안 된 투표 보조인이 기표소에 배치되면 투표에 영향을 행사할 수도 있다”며 “교육받은 공적 조력인 배치를 법으로 의무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해외선 어떻게 하나
해외 여러 국가에서는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 쉬운 공보물 제작, 그림·사진을 활용한 투표용지를 제공하고 있다. 장애인을 포함해 글을 읽지 못하는 모든 유권자를 고려해 투표의 기회를 동등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4일 장애인단체 등에 따르면 후보자의 사진과 정당 로고 등을 넣은 그림 투표용지를 사용하는 나라는 스코틀랜드, 대만, 터키 등 세계적으로 50개국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은 장애인 관련 정부 정책이 발표될 때 큰 글씨·쉬운 문체·그림을 곁들인 읽기 쉬운 형태의 자료를 따로 제작하고, 투표용지 안에 정당 로고도 함께 표시한다. 2010년 총선 이후 노동당 등 주요 정당은 학습·발달장애를 지닌 유권자를 위한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약집’을 발간하고 있다.
스코틀랜드도 투표용지에 후보자 사진과 정당 로고를 넣는다. 정당마다 고유의 색과 로고를 사용해 글을 읽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선호하는 정당과 후보자를 찾아 투표할 수 있다. 이밖에 대만과 아르헨티나, 터키와 이집트 등도 투표용지에 후보자 사진을 넣고 있다.
또 스웨덴은 정부 기관인 ‘접근 가능한 매체 기관(MTM)’을 통해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사진·그림 등이 포함된 선거 관련 자료를 배포한다.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정당별 공약 등을 쉽게 알 수 있다.
발달장애인 단체인 한국피플퍼스트의 한 활동가는 “현재 한국의 선거 공보물은 내용이나 문장 구성이 어려워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쉬운 투표용지와 공보물은 세계적인 추세지만 오랜 기간 진전되지 않았다. 해외 사례를 참고해 우리도 투표용지 등에 변화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