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통화 개념을 둘러싸고 난데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한국의 기축통화국 편입 가능성을 언급한 이후 여야간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이 후보 측은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장을 인용했다는 입장이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애초에 기축통화 개념 자체를 잘 못 이해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논쟁의 발단은 지난 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제20대 대통령선거 후보 초청 1차 토론회에서의 이 후보 발언이다. 이 후보는 다른 후보의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두 차례 “한국이 기축통화국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기축통화는 세계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통용될 수 있는 화폐를 뜻한다. 특정 국가의 화폐가 기축통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발행국이 국제 질서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한다. 선진화된 금융시장과 통화 가치의 안정성 등 전제 조건도 따른다.
시대적으로 기축통화의 위상도 변한다. 미국이 1900년대 들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달러화도 덩달아 기존의 파운드화를 밀어내고 기축통화 지위를 확보했다. 지금까지도 달러화가 세계 교역에서 결제수단으로서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통화에 비해 압도적이다.
이 후보의 발언에 대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나라를 기축통화국으로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가슴이 웅장해진다”며 비꼬았다. 원화가 기축통화 위치에 오를 것이란 전망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꼬집은 것으로 해석된다.
야당의 공세가 시작되자 이 후보 측은 즉각 전경련이 지난 13일 배포한 보도자료를 꺼내 들었다. 해당 보도자료는 ‘원화의 기축통화 편입 추진 검토’라는 제목으로, 올해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집행이사회의 특별인출권(SDR) 검토 과정에서 원화가 SDR 통화 바스켓에 편입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SDR은 일종의 마이너스 통장이다. IMF에 출자금을 낸 회원국은 국제수지가 약화됐을 때 보유하고 있는 SDR을 활용해 담보 없이 외화를 인출할 수 있다. 달러화, 유로화, 파운드화, 엔화, 위안화 등 IMF SDR 바스켓을 구성하는 5개 통화 중 하나를 택해 교환하는 방식이다. 위안화는 지난 2015년 12월 가장 최근에 IMF SDR 바스켓에 편입됐다.
즉 해당 자료는 기축통화를 언급한 제목과 달리, 원화가 IMF SDR 바스켓에 편입될 가능성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전경련 측은 “기축통화의 보편적인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SDR 바스켓에 편입된 화폐를 기축통화로 보기도 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학계에서는 “기축통화를 광의의 의미로 해석하더라도 IMF SDR 통화 바스켓과는 의미가 멀다”고 지적했다. 원화가 SDR 바스켓에 편입된다고 하더라도 기축통화로 불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는 미국 달러화”라고 일축했다. 성 교수는 “기축통화는 기본적으로 다른 나라와의 금융 결제에 사용되는 통화”라며 “국제간 금융 거래를 위해 SDR을 이용하진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엔화와 유로화까지 기축통화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국제 시장에서 호환성이 있는 통화 정도로 봐야 한다”며 “원화가 기축통화 위치에 오를 가능성이 현재로썬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국은행 통화연구실장을 지낸 오정근 자유시장연구원장 역시 “SDR 바스켓을 기축통화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오 원장은 “위안화가 2015년 SDR 바스켓에 편입된 이후 중국 정부가 위안화의 국제화를 추진했지만, 여전히 위안화는 기축통화 위상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며 “SDR 바스켓 편입은 해당 화폐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다는 의미일 뿐”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