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우의미·중관계사] 외교는 군사적 결의를 꺾지 못한다

2022년 2월 24일, 세계가 일제히 우크라이나를 주목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폭격한 것이다. 지난 1월 26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둘러싸고 미국과 나토가 러시아에 몇 개의 협상 의제를 공식화했다. 나토에 대한 러시아의 신뢰 증강 조치, 우크라이나 내 나토군 배치 문제,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안보 문제 등이 상정됐다. 그러나 러시아는 나토의 군사적 인프라를 1997년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릴 것을 주문했다. 협상은 중단되었고, 결과는 러시아의 공격이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미국이 불분명한 원칙과 정책을 고수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는 아무리 명확한 원칙과 정책이라도, 군사적으로 국제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이에게는 무용지물임을 증명한다. 대표적 선례로 1932년 1월 28일 일본의 상하이 폭격 사건이 있었다. 중국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 노골적이었음에도 당시 미국은 나름의 원칙과 전략을 바탕으로 중국의 주권과 영토가 보존될 것이라 과신했다.

1932년 일본의 중국 상하이 공격으로 시가전이 벌어진 모습. 출처:위키피디아

당시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중국에서 사업 경험이 있던 최초의 미 대통령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중국에 대해 불개입 정책을 고수했다. 이런 그의 태도에 미 언론은 “동정은 하지만 우리의 우려는 아니다”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 대한 제재에도 선을 그었다. 월가 투자자의 이익과 1924년 반이민법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1932년 1월 7일, ‘동방박사’로 유명한 친중인사 스팀슨 국무장관이 무력에 의한 영토 소유의 변화 불인정, 미국의 군사적 불개입 등을 담은 ‘스팀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대일본 제재가 불가한 상황에서 외교적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 문제를 접근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도리어 중국 침략에 대한 미국의 무견제로 받아들였다. 스팀슨의 본래 입장처럼 힘에는 힘으로 대응하는 것이 무력주의를 억제하는 데 때론 최선일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