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저에겐 (피신을 위한) 승용차가 아닌, 탄약이 필요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공포에 휩싸인 국민들을 하나로 모은 인물은 ‘정치 아마추어’란 딱지가 붙어 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다. 그는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국이 ‘러시아의 제거 대상 1순위’라며 제안한 대피를 거절하고 우크라이나 국민을 결집했다. 전쟁 발발 전 러시아와 서방 국가 간 치열한 외교전을 펼칠 때 적지 않은 비판을 받은 그였으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짓밟자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떠나지 않으며 주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자 창당된 동명의 정당에서 2019년 대선에 출마한 그는 1차 투표에서 30.24%를 득표해 1위를 한 뒤 결선투표에서 73.22%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된다. 재선을 노리던 재벌 출신 페트로 포로셴코(결선 득표율 24.45%)에 50%p 가까운 차이로 압승했다. 드라마 속 대통령에서 4년 만에 실제 대통령이 된 것이다.
기존 정치권의 부패에 환멸을 느낀 국민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오른 그였지만, 바로 탄탄한 정치인생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부패한 재벌과 정치인을 척결하지 못하면서 국민의 실망이 쌓여간 것이다. 러시아와의 갈등도 커졌다. 우크라이나 의회가 젤렌스키 대통령 집권 3개월 전 유럽연합(EU)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문구를 명시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그도 지난해부터 가입 의사를 본격화하면서 러시아와의 마찰은 심각해졌다. 국내외 위기에 몰린 셈이다.
러시아와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을 위시한 서방 간 외교전이 본격화되면서 우크라이나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축소됐고, 그도 나름의 움직임을 보였지만 국민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지난해 12월 레이팅스의 여론조사에서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지율이 23.5%까지 떨어졌다. 비슷한 시기 뉴욕타임스(NYT)는 그가 정부 요인을 방송계 인물로 채웠다고 지적하며 “젤렌스키 측근들의 경험 부족이 자국을 넘어선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아마추어 같은 실수는 전쟁의 구실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SNS로 국민 결집… “역사에 남을 것”
러시아 침공으로 전쟁이 본격화하자 그에 대한 평가는 180도 변했다.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 맞서 항전하는 모습에 전 세계가 놀란 것이다. ‘제거 대상 2순위’인 그의 아내와 두 자녀도 우크라이나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44세의 젊은 지도자답게 SNS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우크라이나 국민을 격려하고 전 세계에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지난달 26일에는 SNS에 대통령궁을 배경으로 한 ‘셀카’ 영상을 올리며 “밤사이 무기를 버리고 탈출했다는 등 가짜 뉴스가 엄청나게 퍼졌다”며 “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이 현 상황”이라고 도피설과 항복설을 일축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그가 키이우의 거리를 걷는 모습을 보이며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저항을 촉구하는 한편, 유럽 지도자들과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성공적인 소통 전략을 세웠다”고 평가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SNS를 통한 선전전에만 열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1일에는 EU 가입신청서에 서명하면서 외교적 해법도 동시에 꾀하고 있다. EU 가입이 승인되기까지는 많은 절차가 필요하지만,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실질적인 명분을 줬다는 분석이다.
그를 비판했던 NYT도 결국 젤렌스키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했다. 신문은 “러시아의 공격을 받는 동안에도 키이우에 남겠다는 젤렌스키의 결정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며 “그의 노력은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