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떠난 세상, 천사들은 지상 소식을 알려주는 라디오 전파도 힘겹게 포착해야 한다. 인류는 예정된 파국을 향해 질주한다. 무기력해진 천사들은 종말도 섭리로 받아들이려 한다.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지난해 12월 선보인 ‘엔젤스 인 아메리카 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를 잇는 ‘파트 투: 페레스트로이카’ 막이 올랐다. 국립극단의 보기 드문 2년짜리 프로젝트다. 내용도 여러 면에서 파격적인 대작이다. 이 장대한 작품의 시작과 끝을 보기 위해선 중간 휴식을 포함해 1부 250분, 2부 290분, 도합 9시간을 무대에 집중해야 한다.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 서로 어찌 연결될지 짐작할 수 없는 등장 인물 동선을 바삐 뒤쫓다 보면 미로 속을 헤매는 혼돈마저 느낀다. 지난해 1부 공연 때 출연진 연기가 엄청 대단한 무대였지만 도저히 1부만으로는 리뷰를 쓸 수 없었던 이유다.
이미 여러 화제작에서 실력을 입증한 바 있는 신유청 연출은 ‘연출가의 글’을 통해 “처음 배우들을 만나 덜덜덜 떨면서 ‘이 작품은 하늘과 땅이 서로 얽혀 짜내는 매듭과도 같다. (원작자)토니 쿠슈너가 쓴 8시간 희곡의 비밀을 밝혀낸다면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더 나은 나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며 “(2부)페레스트로이카는 이제 그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밝혔다.
연출의 변처럼 뉴욕 센트럴 파크 베세즈다 분수 앞에서 여러 등장 인물들이 모여 지나간 고통의 시간을 회상하며 연대의 힘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전진하는 결말은 따뜻하다. 그렇게 되기까지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여러 유형의 사랑 이야기가 한 흐름으로 엮이는 과정은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떠올리게 한다. 천사를 만나고, 계시록을 얻은 주인공 프라이어의 모험담은 20세기 판 ‘천로역정’이기도 하다.
질병의 공포와 연인의 배신이 더해진 외로움에 고통받는 주인공 프라이어 침실 천장을 뚫고 천사가 나타나는 장면부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형극장, ‘야곱의 사다리’를 연상시키는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등 다양한 사건과 장면이 객석을 압도한다.
그중 이 작품이 전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과장 없이 전달되는 장면은 여러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는 프라이어와 한나의 대화. 우여곡절 끝에 쓰러진 자신을 한나가 병원에 데려다주자 프라이어는 간호사에게 “여긴 제 전 남친의 남친의 모르몬 엄마예요”라고 소개한다. 수상쩍은 낯선 이임에도 한나는 프라이어의 고민을 연륜으로 상담해 준다.
“내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 나에 대해서 함부로 추측하지 말아요, 젊은이. 나도 그쪽에 대해서 그러지 않을 테니.”
“암이에요. 그게 다예요. 그것보다 인간다운 게 어딨어요.”
“천사는 믿음이에요. 날개와 팔로 당신을 이끌어 줄 수 있죠. 만약 당신을 실망시킨다면, 거부해요.”
뜻밖의 공감과 이해를 얻은 프라이어는 떠나려는 한나를 붙잡고 잠들 때까지만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한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 하루가 이렇게 끝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라며 침대 옆 의자에 다시 앉는 한나는 모두가 일상에서 한 번쯤 만나고 싶은 위로다.
박지일-로이 콘, 전국향-한나, 정경호-프라이어, 김보나-하퍼, 권은혜-천사, 정환-조, 김세환-루이스, 박용우-벨리즈. 우리나라에서 ‘또 공연될 수 있을까’ 싶은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이번 초연 멤버는 한명도 빠짐없이 기억될 만하다. 누가 봐도 연기의 질과 양, 모두 어려울 수밖에 없는 작품에서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와 완벽한 조화로 작품을 완성했다. 그중에서도 고참 배우 박지일은 ‘보수의 화신’으로서 죽는 순간까지도 양심 없는 승부욕에 불타오르는 로이 콘을, 전국향은 ‘따스함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독실한 모르몬교인’으로 설정된 한나로 출연해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 준다. 가장 많은 것을 보여 준 배우는 이 작품으로 연극에 데뷔한 정경호다. ‘에이즈에 고통받으면서 인류 운명을 위해 하늘에 올라가 천사들과 담판 짓는다’는 별 다섯 개짜리 난이도를 지닌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2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