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등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제국적 부활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할 뿐 자신의 이익에 손해인 장사는 결국 하지 않았습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정권은 강대국 패권(覇權)놀음에 어리석게 놀아난 결과가 되었습니다.”
러시아 및 한·러 관계 전문가인 홍완석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장 겸 러시아·CIS(독립국가연합)학과 주임교수는 7일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이성보다는 감성에 경도된 우매한 지도력이 낳은 대재앙”이라면서 “우크라이나가 미·러 패권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는 한반도의 거울”이라며 “세계적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 하는 지정학적 숙명을 지닌 한국은 끊임없이 경제력의 고도화, 군사력의 첨단화, 문화력의 세계화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악 시나리오 현실화한 미·러 협상
-결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가장 우려했던 군사적 충돌 시나리오가 현실화됐다. 작년 말부터 우크라이나를 배회하던 전쟁의 유령이 마침내 섬광과 화염을 동반하며 출현했다. 지난 2월 24일 국제사회는 설마가 현실로 바뀌는 섬뜩한 순간을 목도했다. 서구를 비웃기라도 하듯 러시아군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특별군사작전’ 개시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우크라이나의 북쪽, 동쪽, 남쪽 국경을 넘어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물론 예측 시나리오에 포함은 되어있었지만 사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은 합리적 추론을 넘어서는 군사적 모험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현실화한 셈인가.
“푸틴의 다소 무모한 침공에서 러시아의 불가측성을 강조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표현이 새삼 상기된다. 1939년 10월 소련이 독일과 몰로토프-리벤트로프(Molotov-Ribbentrop Pact) 평화협정을 체결할 당시 처칠은 이런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러시아의 행동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들은 불가사의 속의 신비에 싸인 수수께끼와 같다(A riddle wrapped in a mystery inside an enigma).’ 처칠의 언술처럼 러시아는 2008년 예고 없이 조지아를 속전속결로 습격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또한 예측불허로 전격 병합했다. 이번에도 푸틴은 자국민 보호를 위한 평화유지군 파견을 명목으로 돈바스 지역에 국한된 군사작전을 공표해놓고는 돌연 전면 침공하는 허를 찔렀다. 240년 동안 러시아를 지배해 온 기마유목민족 몽골타타르로부터 습득한 무자비하고 신출귀몰한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이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거센 후폭풍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다수의 전문가는 푸틴이 자칫 자살골로 귀결될 수 있는 군사적 침공을 시도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침공설을 일관되게 일축해왔던 푸틴의 노회한 기만술에 국제사회는 농락당했고 분노했다. 그동안 미국의 패권적 전횡과 군사적 일방주의를 강도 높게 공격해 왔던 푸틴의 비판은 위선이었고 내로남불의 전형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주권국가를 침략하고 영토를 유린한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국제법 위반이기 때문에 러시아는 이제 지구촌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국제사회에서 전방위적인 왕따를 자초한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한국의 국익을 위해 대러 우호 관계가 소중하지만 우리 정부도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국제사회의 연대와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
“러시아의 막강 화력과 입체적 공습으로 우크라이나의 수많은 무고한 인명들이 희생되었다. 국제적 반전운동이 들판의 불길처럼 번져가는 가운데 서부 국경으로 피난민 대열이 꼬리를 물었다. 세계 경제도 큰 충격에 휩싸였다. 무엇보다도 국제유가가 천장을 뚫고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주가와 환율, 가상화폐, 금리 등 금융시장은 널뛰기 장세로 요동쳤다. 금과 금속, 곡물 등 주요 원자재 가격 역시 폭등세를 이어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발원하는 글로벌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에 직격탄을 맞아 한국경제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서방의 숨통 조이기에 허물어지는 방화벽
-서방의 대(對)러시아 제재를 정리하자면.
“누차 경고대로 서방은 3월 12일부터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퇴출하기로 결정하는 초강수를 뒀다. SWIFT는 국제 무역 결제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매년 수조 달러가 이를 통해 송금된다. SWIFT 퇴출은 국제 무역, 금융거래, 송금, 외국인 투자의 차단을 의미하기 때문에 제재의 끝판왕, ‘금융 핵 옵션’으로 부른다. 일찍이 러시아에 진출해 높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현대차, 삼성전자, 엘지전자 등 많은 국내기업에도 덩달아 날벼락이 떨어졌다.”
-개별 국가의 제재도 잇따르고 있다.
“2월28일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은 러시아 중앙은행이 자국에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금융자산을 동결했다. 영국 등 서구의 주요 국가도 뒤를 이었다. 해외보유 러시아 외화자산을 묶어둠으로써 외환 방어력 약화와 루블화 폭락을 유도하기 위한 조치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2014년 이래 서구의 제재를 받아온 러시아 경제는 일정수준 그 내성을 갖추었고 또 충분한 외환 보유고를 바탕으로 서구의 가혹한 제재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서구가 대러 금융·무역제재 강화 조치를 잇달아 발표하자 예상 밖으로 러시아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서방의 제재가 실제 효과가 있나.
“SWIFT 퇴출이 예고되자마자 러시아 증권시장과 선물시장은 폭락세로 문을 닫았다. 루블화 가치가 급속히 하락했고, 물가는 치솟았으며, 식료품 사재기 현상마저 발생했다. 소위 러시아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환율 방어 차원에서 기준금리를 20%로 인상했지만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 런던 증권 거래소 상장된 러시아 기업의 주가도 50~60% 이상 하락했다. 앞으로 상황을 더 지켜봐야겠지만 러시아 경제가 서방의 전방위 제재에 예상보다 취약한 모습이다. 그동안 구축해 놓았던 경제 방화벽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황의 악화와 민초들의 경제적 고통 가중으로 푸틴의 입지가 좁아지고 이에 따라 궁지에 몰린 푸틴이 더 큰 군사적 악수를 둘 수도 있다는 우려가 생기는 부분이다.”
-러시아는 제재에 어떤 대응을 하나.
“러시아는 외부로부터 가해져 오는 경제적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2월 28일 비상경제동원령을 발동했다. 러시아 거주자는 획득 외화의 80%를 매각해야 하고, 해외로의 외환 거래를 금지하는 게 주요 골자다. 이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러시아가 보유한 외환보유고 사용을 금지함으로써 발생한 외화부족 사태를 타개하기 위한 비상조치로 풀이된다. 서방의 초강력 제재에 러시아가 과연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푸틴, 핵 카드로 나토의 군사개입 차단
-전망은.
“문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력 투사와 서방의 전면적인 대러 제재 사이에 힘겨루기가 과열되면 3차 세계대전 또는 핵전쟁을 야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서방의 ‘핵폭탄급’ 경제 제재에 푸틴은 군사적 핵 위협으로 맞섰다. 푸틴은 2월 27일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에게 뜬금없이 '3대 핵전력'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장거리 전략폭격기 부대에 핵전력 운용 태세 강화 명령을 하달했다.”
-푸틴의 핵 카드를 꺼낸 이유는.
“푸틴이 이례적으로 핵 카드를 내민 이유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나토의 군사개입 차단과 대미 협상력을 높이려는 측면도 있지만 서방의 고강도 제재 압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겁주기 성격이 더 강하다. 일종의 미치광이(Madman) 전략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상대가 무슨 짓을 하든 양보는 없다’는 치킨게임에서 ‘난 무슨 짓을 할지 몰라’라고 협박하는 미치광이 게임으로의 전환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러시아의 주먹과 서방의 돈줄 조이기가 상승작용을 일으켜 최악의 상황 즉 세계대전, 핵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핵 전쟁 가능성도 있다는 말인가.
“서구가 가한 지옥의 제재와 관련해 유념해야 할 역사적 교훈이 있다. 1941년 미·일 태평양 전쟁 발발 원인이다. 1941년 미국(America), 영국(Britain), 중국(China), 네덜란드(Dutch) 4개국은 일본 군국주의 세력 팽창을 억제하기 위해 전략물자 수출을 금지하는 소위 ABCD 포위망을 형성했다. 당시 일본이 전체 석유 수입의 80% 이상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일 전략물자 금수 조치는 일본에는 치명타였다. 이 금수 조치가 1941년 12월 7일 새벽,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만든 핵심 요인이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코너에 몰린 푸틴의 광인(狂人) 전략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다.”
◆푸틴, 우크라이나 침공 무리수 둔 배경은
-푸틴이 핵전쟁을 무릅쓸 정도로 우크라이나가 중요하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이라는 무리수를 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예측 시나리오에서 푸틴이 최악의 선택을 한 배경이 의문으로 남는다.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정황이 있지만 핵심은 러시아가 최후통첩으로 보낸 8개 항목의 안전보장 요구안 대부분을 미국이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일종의 최후 마지노선으로서 워싱턴에게 요구한 두 가지 선결 조건, 즉 우크라이나의 나토가입 영구불허 보장과 중동부 유럽 나토회원국에 군사자산 배치 제한 요구마저 묵살당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것이 푸틴의 ‘꼭지’를 돌게 해 우크라이나 침공 결정을 내린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의 러시아 요구 묵살(默殺)이 결국 원인인가.
“크레물이 내건 요구조건이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관철되지 못한 상황에서 칼을 빼 든 푸틴이 다시 칼집에 넣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감정과 흥분에 사로잡혀 칼을 휘두른 것으로 추론된다. 막장드라마에 대입해 상황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서방, 특히 미국에 몸과 마음이 홀린 배우자 우크라이나를 목에 칼을 들이대 인질로 잡고, 일방적으로 더는 내 배우자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를 미국이 단호히 거부하자 화가 치민 러시아가 바로 변심한 우크라이나를 찌른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애꿎은 배우자만 중상을 입고 사망 일보 직전이다. 러시아는 살인자가 되었다. 하지만 살인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
-미국은 전쟁 가능성이 있음에도 러시아 요구를 묵살했을까
“워싱턴 전략가들이 미국의 글로벌 패권 장악과 지정학적 이익에 배치되는 크레믈의 안전보장안 요구를 수용할 리 만무하다. 우선 아돌프 히틀러의 침략야욕에 멍석을 깔아준 1938년 뮌헨협정이 반면교사로 떠오른다. 위대한 강대국 러시아의 부활을 대외정치적 슬로건으로 내건 푸틴의 야심으로 보아 재팽창 야망을 부추길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유라시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면서 일극(一極) 우위적 패권 질서를 유지하고 향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잠재적·현실적 도전세력인 러시아의 날개를 꺾어야 한다. 풍부한 경륜의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권고대로 미국으로선 러시아의 제국적 부활을 억제하는 지정학적 급소 우크라이나를 반드시 모스크바로부터 분리해 서방진영으로 포섭하는 게 중요하다. ”
◆미국, 우크라이나 사태로 전략적 이익 확보
-러시아의 요구가 그렇게 무리한 요구였나.
“크레믈이 워싱턴에 청구한 안보견적서는 사실상 냉전 종식 이후 러시아의 안보이익을 제도적으로 반영하고 법적으로 보장하여 새롭게 국제안보 질서를 재편하라는 요구와도 맞닿아 있다. 유럽을 넘어 글로벌 거버넌스에서 크레믈의 지정학적 지분을 일정수준 인정하고 포스트 냉전 질서와 안보 지도를 러시아의 참여하에 새롭게 그리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 소련이 국제안보 문제에 대해 행사했던 영향력을 러시아에도 그대로 인정해 주고 탈소(脫蘇) 공간도 크레믈의 고유 세력권으로 용인해 달라는 것이다. ”
-미국의 입장은.
“미국은 그럴 의사가 전혀 없다. 워싱턴의 시각에서, 냉전의 패배자이면서 동시에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고작 이탈리아 수준인 러시아가 어쭙잖게 강대국 증후군에 사로잡혀 특별대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미국은 러시아가 21세기 글로벌 거버넌스와 국제정치경제체제 속에서 자신이 처한 객관적인 국력과 위상을 명료히 깨닫지 못한 채 큰 착각 속에 살고 있다고 본다. 자기도취에 빠져 아직도 자신이 냉전 시대의 소련인 양 국제안보와 유럽의 여러 현안 등에서 미국과 대등한 목소리를 내려 하고 주제넘은 요구를 하는 러시아의 앙탈을 수용할 수 없다. 오히려 미국에 러시아는 고분고분한 하위파트너로 남든지 아니면 워싱턴의 다양한 국익과 글로벌 패권 유지에 봉사하는 공공의 적(敵) 역할을 맡아줘야 한다.”
-러시아의 ‘공공의 적’ 역할이란.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러시아의 가치는 악당 역할이 제격이다. 강한 헤게모니 지향국가로서 태생적으로 미국에 대한 반골 기질이 강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세력구도에서, 특히 유럽의 정치지형에서 러시아의 반발과 적개심을 잘만 관리하고 이용하면 미국은 최소비용으로 최대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실제로 나토의 무차별 동원에 대한 반작용으로 러시아가 군사적 저항을 강화했으며, 점증하는 러시아의 안보 위협 덕분에 유럽 국가들은 최근 너도나도 군비확충에 혈안이다. 그래서 벌써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만면에 희색이다. 유럽연합의 안보노선 독자화 추동력을 약화하면서 미국의 통제력에서 벗어나려는 독일과 프랑스의 운신 폭도 제한할 수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집권 시기에 금이 간 북대서양동맹 네트워크가 자연스럽게 복구되었고 미국의 지도력도 회복되었다.”
-결국 글로벌 전략을 위해 러시아 의도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는 의미인가.
“지정학적 현실주의 측면에서 미국이 러시아의 안전보장안을 거부해야 하는 핵심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가입 금지 요구를 주요 골자로 하는 안보견적서를 수용할 경우, 북대서양 동맹국들이 유럽안보의 등불이자 경찰로서 미국에 거는 기대와 신뢰에 흠집을 낼 수 있다. 워싱턴의 입장에서, 미국의 안보리더십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리 없다. 호시탐탐 대만 무력통일을 노리는 중국에도, 핵 공갈을 일삼는 북한 김정은 정권에게도 잘못된 신호를 줄 수도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협상 전망 불투명
-이번 사태로 미국이 얻은 이익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국이 얻게 된 가장 큰 반사이익이라고 한다면 에너지 수출시장 확대일 듯싶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기본적으로 유라시아 지배권 장악을 둘러싼 미·러의 지정학적 권력투쟁의 성격을 지니지만, 그 이면에는 유럽 및 글로벌 천연가스 시장 지배력을 놓고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벌이는 에너지 패권투쟁이 숨겨져 있다. 말하자면 유럽 천연가스 시장에서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미국과 러시아 신구(新舊) 글로벌 에너지 헤게모니 세력의 진검승부인 것이다. 싸움의 형태는 전통적 유럽 가스시장 지배자인 러시아에 신흥 에너지 패권국 미국이 도전을 가하는 형세로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가스관인 노드스트림2 프로젝트가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은 이번 핵폭탄급 대러 제재를 통해 러시아의 유럽 천연가스시장 지배력을 높여주는 노드스트림2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오랜 기간 크레물의 중요한 고객이었던 독일은 대러 PNG(파이프라인천연가스) 수입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2개의 LNG(액화천연가스) 터미널 신규 건설을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가 가스를 무기화함에 따라 대체재로 유럽에 대한 미국산 LNG 수출은 현저히 늘어났다. 시장조사회사 케플러에 따르면 미국의 대유럽 LNG 수출 물량은 지난해 1월의 경우 전체 수출량 중 10%를 차지했으나 지난 1월에는 약 60%(430만t)로 급상승했다. 미국은 전통적 PNG 수출 강국에서 LNG 수출 강국으로 전환하려는 러시아의 노력을 억지 또는 봉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미국은 왜 강공 일변도로 나갈까.
“이처럼 러시아와 군사적 대립각을 세움으로써 확보할 수 있는 전략적 수익이 지대하기 때문에 워싱턴은 크레믈과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유럽의 안보문제에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다. EU에 대한 통제권 확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결집력 강화, 유럽에서 미국의 지도력 제고, LNG 수출시장의 확대, 군산복합체에 활로 제공 등 다양한 지정학적·지경학적 이익 확보라는 측면에서 러시아를 주적화해 유럽에서 일정수준 안보적 긴장 고조를 항구화하는 것이 워싱턴에게 필요하고 중요하다. 러시아 역시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밀리고 호락호락 당할 수 없다. 푸틴 시대 힘을 회복하고 전열을 재정비한 러시아는 자국의 배타적 세력권을 수호하고 전통적 영향권을 복구하기 위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며, 미국 및 나토와의 군사대결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결기를 드러내고 있다. 2008년 조지아전쟁, 2014년 크림반도 병합, 2015년 시리아 내전개입, 2022년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등에서 그런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구조적으로 미·러의 타협이 어렵기 때문에 현재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휴전협상이 쉽지 않을 것임을 추론할 수 있는 핵심 포인트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협상도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의미인가.
“실제로 지난 2월 28일과 3월 3일 벨라루스에서 열린 두 차례 러·우 협상에서 양측은 교전 지역에서 인도주의 통로 개설 문제만 일시 합의했을 뿐 핵심 쟁점에서는 평행선을 달렸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적대행위 중지와 돈바스·크림반도를 포함한 자국 영토에서의 즉각적인 철군을 주장했다. 반면 러시아는 (친러 성향의) 돈바스 지역의 독립 인정과 우크라이나의 비동맹 중립을 법으로 명문화할 것을 요구했다. 양측의 요구는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양보 불가의 문제여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를 시사한다.”
◆러시아, 미국의 덫에 걸린 셈
-우크라이나의 전쟁 발발 책임에서 미국도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우크라이나 주권을 훼손한 러시아의 군사작전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지만, 그 이유는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사실 러시아는 미국과 영국이 쳐놓은 우크라이나 덫에 걸려든 측면이 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아프카니스탄화를 바라는 미·영의 전략에 말려들었고, 서구의 무기지원과 우크라이나인의 결사항전으로 이미 수렁에 빠졌다. 우선 봄의 도래로 얼어붙은 땅이 녹아 진창길이 되는 소위 라스푸티차 현상 때문에 보급과 군기동력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군 병사들의 전투력 약화와 사기저하도 심각한 문제다. 과거 프랑스 나폴레옹 군이나 독일 히틀러 군대의 경우처럼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같은 동슬라브 형제국가를 대상으로 한 명분이 약한 침략 전쟁이기 때문에 전쟁수행 의지가 높지 않다. 국제사회가 단일대오로 러시아를 일제히 비난하고 가혹한 제재에 동참한 것도 큰 부담이다. 하루 2조원으로 추산되는 전비도 고통을 가중한다. ”
-미국의 덫에 걸렸다는 의미는.
“미국은 크레믈이 요구한 우크라이나의 나토가입 영구불허 보장을 거부하면서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시 나토의 군사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큰 목소리로 누차 천명했다. 이례적으로 국제사회에 2월 16일 러시아 침공설까지 발설하면서 미리 대사관 직원도 철수시켰다. 이런 행위는 우크라이나가 무주공산(無主空山)이고 지원군도 없을 테니 러시아가 진격하면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암묵적 신호를 보내는 것과 다름없다. 의도적으로 푸틴의 약을 올리며 러시아 탱크를 우크라이나로 유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정황이다. ”
-우크라이나 국민만 전화(戰禍)에 고통을 받게 됐다.
“미·러 두 제국주의 세력의 지정학적 권력투쟁에서 결국 우크라이나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되었다. 러시아는 자신의 세력권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인질로 잡고 미국과 나토를 겁박하다가,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러시아는 스스로 세력권을 확보하겠다고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워싱턴은 정작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안전한 피난처가 될 수 있다는 환상만 심어주었다. 그 환상에 넘어가 2004년 오렌지혁명 이래 우크라이나는 서구에 나토가입을 지속적으로 강청했고, 2019년 2월 젤렌스키 대통령 정권은 개헌을 통해 나토가입을 헌법에까지 명시했다. ”
-서방은 우크라이나의 나토가입을 용인할 분위기인가.
“서방은 우크라이나의 나토가입 요청을 반복적으로 부결했다. 미·영은 1994년 12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포기와 영토·주권을 보장한 미·영·러의 약속) 체결 당사자임에도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할 당시 그저 바라만 본채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존을 위한 군사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주권 보장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도 나토는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을 우려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요청한 우크라이나 영공에 대한 비행금지구역 설정도 하지 않았다. 요컨대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재소련화, 재팽창 야망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할 뿐 우크라이나로 인해 자신들의 이익에 손해되는 장사는 하지 않았다. 인도적 지원과 무기만 대줄 뿐 러·우 전쟁을 관전하고 평가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의 영웅적 저항을 칭찬하면서 잔인하게 즐기고 있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강대국들의 패권놀음에 어리석게 놀아난 결과가 되었다.”
◆외교안보 실패한 우크라이나 결국 전장화
-우크라이나로서는 외교안보 정책의 실패다.
“지난해 말부터 본격화된 우크라이나 사태에는 각기 역할 비중이 다른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등장했다. 전쟁으로 비화한 우크라이나 사태를 유럽을 배경으로 한 한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로 상정하고 출연자들의 역할을 간명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로케이션(촬영지) 우크라이나 ▲연출 감독 미국 ▲수석 조연출 영국 ▲주연 러시아 ▲조연 독일과 프랑스 ▲엑스트라1 폴란드·루마니아·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투비아 에스토니아) ▲엑스트라2 벨라루스 ▲카메오 터키 ▲주요 관객 중국 ▲개봉 지구촌.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러의 지정학적 충돌은 한쪽이 이기면 다른 쪽은 패하는 제로섬게임이 아니라 적대적 공존 성격이 짙다. 어떻게 끝나든 미국과 러시아는 강대국의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길 것이다. 패자는 결국 우크라이나일 수밖에 없다.”
-과거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 전장이 된 한반도가 최대 희생자이었던 것처럼 결국 우크라이나가 최대 피해자인 것 같다.
“우크라이나는 미·러의 패권투쟁에 희생양이 되었다. 연일 뉴스 헤드라인으로 다뤄지는 언론보도를 통해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처참한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국토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변했고 주요산업지대는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무고한 인명들이 살상되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겪고 있는 아비규환의 참상은 서방이 러시아에 가한 메가톤급 제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영토가 절단 나고, 120만 명이 피난처를 찾아 국경을 넘고, 아무 죄 없이 고통받고 죽어 나가는 우크라이나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한 우리 국민 모두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전쟁은 누구의 책임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전 영토가 포성과 화염에 휩싸인 마당에 천조국 미국에 섭섭함을 토로하고 침략자 러시아를 증오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걸 따지는 것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다.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희망적 사고와 추상적 정의에 매몰된, 이성보다는 감성에 경도된 우매한 지도력이 낳은 대재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안보장사에 맛을 들인 우크라이나 기득권 세력과 미국과 내통해 국가를 포획한 신나치주의 극우세력에게도 책임이 크다고 본다.”
◆ 한국·우크라이나 지정학적 도플갱어
-우크라이나 사태가 한국에 주는 교훈은.
“우크라이나는 한반도의 거울로 표현할 수 있다. 유럽의 우크라이나와 동북아의 한국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양국이 처한 지정학적 환경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매우 유사하다. 우크라이나와 한국 모두 세계적 강대국 사이에 끼인 소위 중간국가이고 각기 유라시아의 서쪽 날개와 동쪽 날개에서 역내 패권국의 세력판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지정학적 추축(樞軸)국가(Pivot State)라는 점에서 그렇다. 양국 모두 자국의 대외적 좌표 선택이 국가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우크라이나는 미·러 두 지정학적 거인이 엮어내는 여러 형태의 세력 투쟁 속에서 준(準)제로섬적인 선택을 강요받고 있고, 한국 역시 미·중 사이에서 외교적 좌표설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러의 대치 상황은 한반도에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던져준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주목해야 하는 포인트는.
“2022년 우크라이나 사태가 한국에 주는 지정학적 함의는 다양한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크게 2가지 측면을 강조하고 싶다. 먼저 동맹의 소중함도 새삼 확인되지만 자강(自强)이 우선이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의 국가적 위기에 미·러의 다툼과 전략만 보일 뿐 우크라이나는 안 보인다. 우크라이나 위기 해소를 위한 미·러의 협상에 정작 우크라이나의 자리는 없었다. 풍전등화의 국가적 위기를 외세에 의존해야 하는 약소국의 비애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누란지세의 위기는 사실 우크라이나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있다. 예컨대 우크라이나 정치권의 무능과 리더십 부재, 정쟁의 일상화, 만연한 부정부패, 극심한 부의 편재, 만성적인 경제위기, 고질적인 동서 지역갈등 등을 지적할 수 있다. ”
-우크라이나 내부 문제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의미인가.
“스스로 힘을 키우지 않으면 주변 강대국들의 위세에 휘둘리고 안보와 국익을 침탈당할 수밖에 없는 게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이다. 1905년 미·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그렇고, 1945년 미·소의 남북분단이 그렇고, 1953년 한국이 빠진 미·중의 휴전협정이 그렇다. 바로 여기서 우크라이나 위기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 하나를 찾을 수 있다. 의존은 힘과 외교력을 약화하기 때문에 부국강병을 토대로 부단히 안보와 외교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시점에서 한국에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지속적인 국방력의 강화와 함께 동맹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전시작전권의 조속한 환수라고 본다. 자강이 결여된 세력균형은 결국 외세에의 종속으로 귀결되었다. 미·중·러·일로 대표되는 세계적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 하는 지정학적 숙명성을 지닌 한국이 끊임없이 경제력의 고도화, 군사력의 첨단화, 문화력의 세계화를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 自强과 국익기반 실용외교 필요
-한국에 필요한 외교안보적 사고(思考)는.
“국익 우선의 실용외교 강화도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시사점이다. 말하자면 오랜 기간 한국외교를 짓눌러왔던 대외정치적 도그마로부터의 탈각(脫却)이다. 우크라이나의 페트로 포로센코(2014∼2019년 재임 중 친서방 반러 정책 추진) 및 젤렌스키 대통령 정권이 보여주듯 미·러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충돌하고 민감하게 교차하는 지정학적 공간 우크라이나에서 외교노선의 양자택일은 결국 스스로 대외정치적 입지를 좁혔고 국익을 침식시켰으며 안보위기를 초래했다. 국내적으로도 사회적 긴장을 높였고 경제·금융 안정성도 해쳤다. 미·중, 미·러 사이에 있는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교훈이다.
-한국은 미·중·러·일 강대국에 둘러싸여 더욱 복잡한 상황인 듯하다.
“동맹관계인 미국, 전략적 관계인 중국과 러시아 모두 21세기 한국의 생존과 국가적 번영을 좌우하는 글로벌 강대국이라는 점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한·미, 한·중, 한·러관계의 지정학적 숙명성에 비추어 양자택일 외교 또는 진영외교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의 대외정치적 선택지는 한국의 국익과 안보에 이롭지 못하다. 한국외교의 대상들이 모두 끊임없이 움직이는 목표물이고 동시에 한국 자신도 쉬지 않고 변동하는 행위주체라는 점을 명료히 인식하는 가운데 국제관계에 대한 관성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에 기초한 대외전략을 강구해야 한다. 그 방향성은 철저히 냉철한 국익기반의 실용외교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한국에 주는 가장 큰 시사점이자 핵심 교훈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