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국립 미술학교서 본격적인 공부 ‘앵그르 신고전주의’ 레만 스승 만나 軍복무 후 들라크루아 작품 등 접해 ‘빛 파장 따른 색’ 관심 갖고 과학 공부
물감 섞지 않고 원색 화면 병치 작업 붓질 흔적 작아지고 점으로만 표현 시작 2m 넘어서는 점묘법 완성된 작품 탄생 전염성 후두염 걸려 서른두살에 요절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쁨
어느새 3월이 되고 학생들은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맞이했다. 그 모습을 보다 지난 겨울, 개인적인 사정상 외국어 시험을 준비한 일이 떠올랐다. 시험을 앞두고 어린 시절 배워 둔 몇몇 언어 중 하나를 선택하려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발전 없는 편안한 삶을 도모하며 사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십대 시절 배운 언어만으로 지난 사회생활을 버텨왔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배워보지 않은 언어를 배워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 공부와 일을 하며 수시로 나오지만 읽을 줄 몰랐던 프랑스어 수업을 신청했다.
주 3일, 하루 3시간씩 수업을 듣는 것은 예상보다 고된 일이었다. 암기도 워낙 오랜만이라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외우는 데도 한참 걸렸다. 하지만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하며 팬데믹 이후 특히 극심해진 일상의 권태가 깨졌다. 매일 반복하는 일도 지루하지 않았고 밤의 휴식이 더 소중해졌다. 잠자는 시간은 줄었지만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기쁨이 수시로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도전하며 작업한 수많은 작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점묘법으로 유명한 화가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 1859-1891) 역시 그들 중 한 명이다.
◆배움에 주저하지 않은 화가
쇠라는 1859년 태어나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법조계에 근무했으며 큰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했다. 여유로운 가정 환경 속에서 미술에 재능을 보이며 자연스럽게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 근처에 위치한 조각가 쥐스탱 르키앙(Justin Lequien)이 운영하는 교습소에 들어갔다. 이후 파리의 명성 높은 국립 미술 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그가 에콜 데 보자르에서 만난 스승은 앙리 레만(Henri Lehmann)이었다. 레만은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작업실 출신으로 앵그르의 신고전주의를 따랐다. 고대 미술을 지향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두고 표현의 완성에 집중하는 그림이었다. 이러한 성향은 수업에서도 드러나 조각을 보고 그리게 하거나 대가의 그림을 모사하게 했다. 쇠라 역시 유명한 그림들을 똑같이 따라 그리며 손에 도구를 익혔다. 더불어 기존 미술에 관한 풍부한 지식과 이해를 갖췄다.
쇠라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5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1년간 군 복무를 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사관학교에서 근무했고 파리로 돌아온 뒤에는 작가로서의 작업실을 마련했다. 친분이 있던 에드몽 아망 장(Edmond Aman-Jean)과 공간을 나누며 다시 미술에 열의를 올렸다. 혼자 작업과 연구를 지속하며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의 작품 등을 접했다. 들라크루아는 학교에서 배운 신고전주의와 대조적으로 감정적이며 형태보다 색의 사용에 더 집중한 작가였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접하며 색에서 나아가 색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상이 빛을 받을 때마다 빛 파장에 의해 특유한 색을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색채에 관한 이해를 위해 일찍부터 미술 학교에 진학해 접해보지 않았던 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특히 과학자 셰브뢸(Michel Eugene Chevreul)의 연구 중 병치 혼합 현상에 심취했다. 하나의 색이 인접한 색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흰색과 검은색의 점을 번갈아 찍은 부분이 멀리서는 회색으로 보인다.
쇠라는 이후 그림을 그릴 때 과학적 접근 방식으로 색을 다루었다. 팔레트에서 물감을 섞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원색만 화면에 병치하여 칠했다. 그는 이러한 작업 방식을 색을 나누어 칠한다는 의미의 ‘분할주의’라고 불렀다. 색을 나누어 칠하는 붓질의 흔적은 점차 작아졌고 어느 순간 점이 되었다. 분할주의보다 점묘법으로 대중에 널리 알려진 쇠라만의 그림은 이렇게 탄생했다. 더불어 그는 그림에 물감 대신 아연 등 최첨단 재료를 사용하는 실험도 펼쳤다.
◆작은 점으로 그린 파리 생활
조르주 쇠라가 미술을 배우고 작업한 때는 변혁의 시기였다. 카메라 등장 이후 화가들이 다양한 실험을 펼치고 있었다. 그중 인상주의는 빛과 함께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을 묘사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따라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색의 변화를 짧은 붓질로 색을 겹쳐 칠해 표현했다. 하지만 색을 겹칠수록 빛의 찬란함과 달리 화면은 칙칙하게 바뀌었고 형태는 무너졌다. 쇠라의 점묘법은 이러한 당대 인상주의 화가들의 고민을 해결해낸 해답이었다 볼 수 있다.
쇠라는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인상주의 전시에 점묘법으로 완성한 작품을 출품했다. 바로 그를 대표하는 작품인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1884-1886)이다. 이 작품은 실제로 마주하면 높이 2m를 넘어서는 크기에 놀란다. 거대한 캔버스에 수많은 점을 찍어 그가 그린 것은 파리라는 근대 도시 속 사람들의 여가였다. 그림 속에서 파리지앵들은 센강 안의 그랑드 자트 섬에서 주말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햇살이 따듯하게 내리쬐는 봄 또는 여름의 오후. 파란 강과 그 강가에서 사람들은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누군가는 카누에 올라 노를 저으며 강을 가르고, 누군가는 잔디에 누워 그 모습을 구경한다. 민소매 티셔츠를 걸친 사람부터 부르주아 스타일로 차려입은 사람까지 옷차림과 계층도 각양각색이다. 공통적인 것은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대상은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그려졌다는 사실이다. 화면은 원근법의 적용 속에 중앙의 어린 소녀가 입은 흰색을 중심으로 색채 대비에 의해 채워진다.
이렇게 쇠라는 점묘법을 본격적으로 적용하며 해가 있는 낮의 장면을 그렸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인공조명이 있는 밤의 모습을 그리는 시도를 펼쳤다. ‘서커스 사이드쇼(Circus Sideshow)’(1887-1888)는 쇠라가 밤을 그려 자기 기술의 다양성을 보여준 첫 작품이다. 이 작품은 파리 나시옹 광장에 등장한 서커스의 사이드쇼 모습을 포착했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여가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두운 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장소에 모여 있다. 왼쪽에 보이는 나무가 야외임을 추정하게 한다. 한가운데는 공연 복장을 한 남성이 무대 위에 서서 악기를 불며 제 모습을 뽐내고 있다. 뒤로 보이는 인물들 역시 악기를 연주하는데 음을 보태는 것 같다. 음악 소리를 듣고 모인 사람들은 무대 아래서 구경한다. 오른쪽에 서 있는 남성은 이 모든 상황을 감독하듯 뒷짐을 진 채 바라본다. 상단에 자리 잡은 가스등 아홉 개가 이 모든 장면을 비춘다.
쇠라는 전염성 후두염에 걸리며 서른두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의 중요성은 동료 폴 시냑(Paul Signac)이 남긴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D'Eugene Delacroix au neo-impressionnisme)’를 통해 후대에 전해졌다. 이 글에서 강조한 쇠라의 새로움은 마티스(Henri Matisse)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쇠라는 언젠가 자기 그림에 관해 다음 같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