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가 묵묵히 오솔길을 걷고 있다. ‘심각한 발걸음(Serious Steps)’이란 제목의 흑백 사진은 1961년 4월 미국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뒷모습을 담았다. 사진을 찍은 AP통신 폴 바티스 기자는 “고개를 숙인 채 길을 따라 걸어가는 그들이 매우 외로워 보였다”고 했다. 당시 케네디는 쿠바 공산화와 ‘피그스만 침공’ 작전 실패로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공화당 출신의 아이젠하워를 초청한 건 작전 실패 직후였다. 케네디 행정부의 나약함을 못마땅해했던 아이젠하워가 어떤 조언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두 지도자의 만남 자체가 전쟁설로 불안한 국민들에는 힘이 됐다.
당적을 떠나 전·현 대통령이 만나는 장면이 미국에선 낯설지 않다. 기괴한 일이 많았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도 대통령직의 무게는 다르지 않았다.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호의와 격려의 편지를 남기는 전통이 이어지는 것도 그 자리의 무게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케네디와 아이젠하워 같은 만남은 일종의 판타지다. 87년 체제 이후 대통령의 역사는 실패와 단절의 역사였다. 생존해있는 전직 대통령 처지만 봐도 알 수 있다. 한 사람은 구치소에, 최근 사면을 받은 한 사람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생존한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적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김 대통령은 “국민에게 통합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들과 국정 경험을 나누면서 국난 극복의 지혜를 얻고자 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대통령 리더십을 오래 연구한 김충남 박사는 한국 대통령의 실패에 대해 “전직 대통령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는 제도적 기억장치가 없다”(대통령과 국가경영, 서울대출판부, 2006)고 했다. 대선 후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만남은 대개 의례적인 수준이었다. 새 정권이 출범하면 ‘속죄양의 정치’가 되풀이됐다. 김 박사는 “새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 기반과 정통성 강화를 위해 전임자를 정치보복 대상이나 속죄양으로 삼는 풍토가 대통령직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시켰다”고 했다. 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이 극심한 분열 정치뿐 아니라 정권교체의 주역까지 키운 건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