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마지막 화사, 동트는 새벽에 빼앗긴 봄을 그리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80) 광화문에 봄이 오면

최초 근대 미술 교육기관 ‘서화미술회’ 연 화단의 스승 안중식
1915년 경복궁 전각이 헐리자 ‘백악춘효’로 본래 풍경 되살려
광화문·해치상도 철거 등 고초… 조선의 자존감 살리며 ‘저항’
1919년 내란죄로 고된 문초 당하다 지병 악화되어 세상 떠나
‘백악춘효(다른 이름: 등록문화재 백악춘효 2021)’(1915)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근대 화단의 스승 안중식

안중식(1861∼1919)은 조선 말기부터 근대기에 활동한 화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고희동의 스승이기도 하다. 본관은 순흥이며 아명은 욱상, 본명은 종식이었고 1890년대부터 중식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심전(心田), 경묵용자(耕墨傭者), 불불옹(不不翁) 등 다양한 호 중 심전으로 많이 불린다. 현재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에서 아버지 안홍구와 어머니 사이에서 5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와 증조부 모두 벼슬을 지냈으며 아버지 안홍구는 성균관 생원, 형 안종설은 초계군수를 지냈다. 그 외 다수의 인물이 벼슬을 지낸 집안이었으나 안중식은 12세 되던 해에 부친을 여의었다.



안중식이 화가로 활동한 기록은 1881년 20세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때 중국 청진으로 가는 영선사 일행으로서 관비 유학생으로 파견됐다. 파견 중 1년간 신식 무기의 제조법과 조련법, 한문과 서양 문자 습득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듬해 임오군란으로 조선의 상황이 급격히 변하며 서울에 돌아오게 됐다. 귀국 이후에는 새롭게 설치된 우정국에서 사사를 지냈고 중국 상해 등지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돌아오고서 그는 지평현감에 부임했으며 안산군수도 맡았다. 하지만 2년 조금 넘게 일한 그는 붓을 잡았다. 유학생과 여행자 경험을 하며 넓힌 안목으로 예술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1899년 다시 상해로 떠났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오사카 등지에서 활동했다. 서울에 들어와서는 어진 도사에 조석진과 함께 화사로 선발돼 이름을 알렸다. 청진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후에도 평생 친구로 사귀며 예술 대가로 쌍벽을 이뤘다. 고종 황제의 어진과 순종의 예진을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왕실을 비롯한 주요 관리들의 요청으로 작품을 제작하며 전업 화가로 자리 잡았다.

그가 이 시기 작품 제작 외에 집중한 것은 후진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1901년 자기 화실인 경묵당에 이도영을 첫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고희동 역시 안중식의 문하에서 3년간 화도 수업을 받았다. 첫 문하생을 기점으로 10년이 지난 뒤 1911년에는 교육에 더 힘쓰기 위해 서화미술회를 열었다. 서과(書科)와 화과(畵科)로 구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미술 교육 기관이었다. 안중식을 비롯해 강진희, 정대유, 조석진, 강필주, 이도영, 임응원이 지도를 맡았다. 근대 한국 화단의 주축이 된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등이 여기서 그림을 배웠다. 안중식은 이 중 이상범과 노수현을 매우 아껴 자기 호 심전(心田)의 글자를 나눠 노수현에게 심산(心山), 이상범에게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내렸다.

1918년에는 서화협회를 김규진, 이도영, 고희동 등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지냈다. 서화계의 지도적 인물로 인정받으며 금강산으로 사생 여행을 다녀와 예술을 논했다. 하지만 시대의 고난은 그에게도 해당했기에 그 논의를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1919년 일어난 3·1 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 몇몇 인사와 친분을 가졌던 그를 일본 경찰들은 내란죄로 체포했고 고된 문초를 가했다. 석방됐으나 쇠약해진 몸은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고 지병이 악화해 세상을 떠났다.

◆안중식이 그려낸 봄의 풍경들

안중식은 처음 그림을 그리던 시절 청나라 화풍을 가졌다. 그는 당시 간행된 ‘해상명인화보(海上名人畵譜)’와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 중국 화보를 보았다. 중국을 세 차례 방문하며 청나라의 그림을 직접 본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더불어 그는 자기보다 십수 년 앞선 조선 화가들의 화풍도 드러냈다. 청나라의 화풍을 조선의 방식으로 소화한 장승업의 영향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안중식은 장승업으로부터 비공식적인 배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명절지도’

안중식은 산수, 인물, 화조 등 모든 화목을 정통하는 높은 기량의 화가였다. 서양의 정물화처럼 보이는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에도 능한 모습을 보였다. 보배롭고 진기한 제기, 화기 등 옛 그릇을 꽃 나뭇가지 등과 합쳐 그린 그림이다. 이 중 그의 화풍을 대표할 수 있는 분야로는 산수화가 꼽힌다. 그의 산수화는 서화미술회를 열 무렵인 1910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에는 장승업의 화법을 따라 청의 남종화풍과 북종화풍, 그리고 그 절충의 모습을 보인다. 후기에는 이 절충 양식을 바탕으로 화면을 발전시켜 원숙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함께 활동한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수화에서 근대적 면모를 보였다. 앞서 사생 여행을 언급했듯 관념뿐 아니라 실경산수화도 그렸으며 투시법으로 근대적 구도를 선보였다. 현실적인 시각으로 풍경을 보았고 사실적 묘사와 색채의 활용으로 남다른 섬세함을 드러냈다. 영광을 그린 ‘영광풍경도(靈光風景圖)’, 금강산을 그린 ‘명경대도(明鏡臺圖)’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의 이러한 근대적 면모가 이상범 등에 전해져 주체적인 우리 미술의 개척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춘경산수(春景山水)’(1909)는 1910년대 접어들며 선보인 안중식만의 독특한 화풍의 선례가 되는 작품이다. 여기 봉우리, 봉우리를 따라 높이 솟은 산이 있다. 산에 올라가는 고비, 고비에는 푸릇푸릇한 나무들이 서 있는 게 보인다. 이 산을 그림의 하단부부터 따라 올라간다고 상상하면 오르는 길에 나무들의 싱그러움이 더 잘 느껴진다. 짙은 녹색 나무와 이제 막 잎을 틔우는 연두색 나무가 사이좋게 번갈아 나타난다. 그렇게 바위산을 한참 걸어 도착할 목적지는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정상이다. 옅게 채색한 정상에는 해를 받아 벌써 꽃이 핀 것인지 분홍빛이 비치는 듯하다.

이 작품은 원근법을 적용한 안중식의 근대적인 감각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서화 양식을 따랐다. 작품을 소장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우측 상단의 시문 내용을 다음과 같이 풀어놓았다. “녹음 우거져 그늘이 짙고 구불구불한 길은 가팔라/ 선인이 사는 집은 속세 밖에 있는데/ 냇가에 한바탕 온 밤비에/ 무수한 벽도 꽃이 떠내려가 버렸네/ 융희 기유년 가을 자화 인형의 부탁을 위해 그리다./ 심전 안중식”

‘백악춘효(白岳春曉)’(1915)는 정립된 자기만의 화풍으로 ‘춘경산수’에서보다 적극적으로 근대적 감각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봄의 새벽 백악산을 포함한 풍경이 화면에 담겨 있다. 화면 높은 곳에는 백악산이, 그 아래에 경복궁의 전각과 광화문, 그 앞에 해태상이 세로 방향으로 나란히 보인다. 종로 육조거리는 텅 비었고 경복궁 전각은 구름 또는 안개에 가렸다. 고요한 동틀 무렵 풍경 한가운데서 광화문은 자기 모습을 온전히 보여준다.

‘매화서옥도’

이 그림은 1915년 동일하게 그려낸 두 개의 작품 중 하나다. 두 점은 여름과 가을에 그려졌지만 봄의 풍경을 묘사한 점이 눈에 띈다. 1915년은 조선총독부가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 해다. 경복궁의 전각들이 부서지고 신식 가건물과 서양식 건물들로 그 자리를 채웠던 때다. 즉, 안중식은 조선 왕실의 건물이 훼손되자 본래 풍경을 되살려 화면에 담았다. 작품을 소장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이를 두고 조선의 마지막 화사였던 안중식의 자존감을 엿볼 수 있다고 읽어낸다.

‘백악춘효’가 그려진 이후 광화문과 해치상은 경복궁에 이어 고초를 겪었다. 광화문은 조선총독부청사 건립과정에서 철거당했고 해치상은 총독부청사 앞으로 자리를 옮겨 놓였다. 광화문은 이제 복원됐지만 해치상은 제 위치에서 1m 정도 떨어졌다고 알려졌다. 광화문은 올해 공사를 마치고 재개장하며 물리적 변화뿐 아니라 개념적 변화를 경험할 것 같기도 하다. 새로운 변화를 앞둔 광화문을 생각하다 문득 이 그림이 떠올라 꺼내어 가만히 바라본다. 안중식이 그림을 그린 여름과 가을이 아니라 봄날의 새벽을 시간적 배경으로 선택한 사려를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