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이 만드는 세계, ‘연니버스’에는 늘 죽음이 가까이 있다. 죽음의 길목에 선 인물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부산행’에서는 살기 위해 누군가의 삶을 내던졌고, ‘지옥’은 죽음을 이용해 다른 이 삶을 흔들었다. 좀비와 사자 같은 재앙이 어떻게, 왜 다가왔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애초 재앙은 사회 민낯을 드러낼 장치일 뿐이다. 11년 전 연 감독이 연출한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역시 학교폭력을 그려내지만 근원에는 계급사회에 대한 서늘한 시선이 자리 잡고 있다.
적나라한 현실 묘사로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칸 영화제 초청을 받았던 ‘돼지의 왕’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기초 작업에 원작자인 연 감독이 참여했고, 극본은 탁재영 작가가 집필했다. 96분짜리 원작을 12부작 드라마로 확장하면서 원작의 학교폭력 서사에 스릴러를 더했다. 이야기 몸집은 커졌지만 원작 메시지는 고스란히 가져갔다.
탁 작가에게 드라마 각본 집필을 먼저 제안했다는 연 감독은 “원작을 그대로 드라마로 가져가기에는 내용이 많이 부족했다. 탁 작가와 스릴러 연쇄살인 구성으로 가자고 얘기했고, 탁 작가가 그 구성을 재밌게 만들어줬다”고 했다. 이어 “원작에는 성인이 된 학교 폭력 가해자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데,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드라마는 그에 대한 답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연 감독은 드라마 기본 설정 및 2회까지 대본을 같이 쓰고 이후 스토리엔 관여하지 않았다.
원작처럼 드라마 역시 폭력을 묘사하는 수위가 매우 높다.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기는 하지만, 잔혹한 복수로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야기가 불편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탁 작가는 최근 가진 라운드 인터뷰에서 “끔찍한 사건을 겪은 인물들이 트라우마로 인해 현재 하는 행동을 시청자들이 납득하려면 과거 사건을 현실감 있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면서도 복수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탁 작가 말처럼 이 작품은 ‘폭력에 대한 폭력이 정당한가’에 대한 도덕적 딜레마를 그린다. “드라마 초반부 가해자에 대한 복수가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느끼게 했다면 중후반으로 갈수록 주인공은 복수의 정당성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며 “시청자도 배신감을 느끼면서 자신이 느꼈던 카타르시스가 잘못됐는지 스스로 고민하고,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 감독 역시 “‘돼지의 왕’은 카타르시스를 통한 대리만족을 목적으로 만든 작품은 아니다. 그런 카타르시스가 정당한가, 피해와 가해를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가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라며 “극이 진행될수록 피해와 가해가 얽히는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작이 오래전 나온 만큼 드라마 속 세부 설정은 상당히 바뀌었지만 폭력이 주는 잔혹함과 피폐함은 그대로다. “사회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어떤 의지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지가 있는지 개인적으론 잘 못 느끼고 있습니다. 11년 전 ‘돼지의 왕’이 보여준 디스토피아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폭력은 예전보다 오히려 더 고도화되고 복잡해진 거 아닐까 싶습니다.”(연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