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상담하니 “경찰 신고하세요”… 대학 성폭력 전담기구 ‘있으나마나’

대학 98%가 전담기구 있다지만
행정기관 등 소속돼 형식적 대응

별도 독립기구로 운영 13.6% 불과
피해자 보호 등 표준 규정도 없어
“제 역할 하도록 정부 대책 마련을”
사진=연합뉴스

경기도의 한 대학에 다니는 A씨는 지난달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했다. 한 남자 선배가 술에 취해 다른 이들 앞에서 “너랑 자고 싶다” 등 성적 발언을 한 것이다. 며칠이 자나도 불쾌감이 사라지지 않자 A씨는 교내 성희롱·성폭력 전담기구(이하 전담기구)에 상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말이었다. A씨는 “담당자가 따로 있지도 않았고, 다른 일을 하던 교직원이 상담했는데 귀찮아하는 것 같아 당황했다”며 “피해가 크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어떠냐는 이야기만 듣고 왔다”고 토로했다.

대학에서 성희롱·성추행 등 성폭력이 잇따르면서 사건을 일차적으로 담당하는 전담기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지만, 일부 대학에서는 전담기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일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2021년 대학 성희롱·성폭력 전담기구 실태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전국 411개 대학 중 159곳(38.7%)에서 교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이 접수됐다. 접수된 사건은 1∼5회(143곳)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지만 6회 이상인 곳도 16곳에 달했다. 1곳은 1년간 21회가 넘는 사건이 접수됐다.

411개 대학 중 전담기구가 설치된 곳은 405곳(98.5%·지난해 8월 기준)이었다. 6곳은 아예 전담기구가 설치되지 않았다. 전담기구가 설치된 대학도 별도 독립기구로 운영 중인 곳은 13.6%에 그쳤다. 40.3%는 학생상담센터 내 부설 또는 겸직 형태로, 24.4%는 교내 행정기관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2018년 교육부의 ‘교육 분야 성희롱·성폭력 근절 추진단’은 전담기구를 총장 직속 독립기구로 설치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대학에서 전담기구는 행정기관 등에 소속된 상태다.

행정기관에 소속된 전담기구는 독립된 전담기구보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미흡한 면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학 411곳 중 성폭력 사건 처리 규정조차 없는 곳은 2.7%(11곳)였는데, 특히 행정기관에서 전담기구를 운영하는 곳 중 규정이 없는 곳은 6.1%(6곳)나 됐다. 반면 독립기구로 운영하는 곳은 모두 규정이 있었다. 또 독립기구는 상담공간 설치율이 90.9%였으나 행정기관에서 운영하는 곳은 74.7%에 그쳤다.

초·중·고교나 직장은 성폭력 사건 발생 시 피해자 분리·보호 조치 등이 시행된다. 하지만 대학은 관련 규정이 없어 전담기구 설치 의무화, 표준화된 보호조치 규정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표준 가이드라인조차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전담기구 중 가해자 징계 등 조치는 57.3%만 하고 있었고, 법률적 지원(40%), 의료적 지원(37.8%) 등 피해자 지원을 하는 곳도 적었다.

전담기구들은 운영의 어려운 점으로 △전문 인력 부족(35.3%) △정규 직원 부족(19.7%) △재정 부족(13.2%) 등을 꼽았다. 업무 담당자들은 ‘업무가 과중하다’(32%), ‘중요 정보 및 지식이 부족하다’(20.8%)고 답하기도 했다.

서울의 한 대학 총학생회 관계자는 “현재 전담기구들은 제 역할을 못 하는 곳이 많다”며 “단순히 전담기구를 설치하는 게 능사는 아닌 만큼 정부 차원에서 전담기구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