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가 ‘산불·폭우 원투펀치’ 부른다

지난달 초 경북 울진군에서 발생한 산불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기후변화가 대형 산불에서 홍수·산사태로 이어지는 이른바 ‘산불-폭우 원투펀치’ 재난을 더 자주 일어나게 할 것이라는 해외 연구결과가 최근 나왔습니다. 앞으로 화석연료 이용을 줄이지 않을 경우 미국 서부 기준으로 대형 화재 피해 지역 대부분이 짧은 기간 내 수차례 폭우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겁니다.

 

이 연구는 최근 대형 화재를 겪은 우리나라에도 시사점을 줍니다. 지난달 초 발생해 역대 최장 기간 이어진 산불로 2만ha(헥타르) 넘는 산림이 잿더미가 된 동해안 지역에 대해 올여름 장마철 산사태 등 2차 피해 우려가 높기 때문입니다.

 

3일 AP통신에 따르면 최근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기후변화가 미국 서부 지역 내 산불-폭우 연계 재난 빈도를 높인다는 내용을 담은 연구가 발표됐습니다. 이 연구는 미국 서부 11개 주를 조사했고, 이 중 산불-폭우 연계 재난 증가가 가장 두드러지는 4개 주를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 화석연료 이용을 전혀 줄이지 않아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 증가하는 기후변화 시나리오(RCP 8.5)를 가정한 뒤 산불-폭우 연계 재난 발생 빈도를 전망한 겁니다. RCP(Representative Concentration Pathway)는 화석연료 감소 노력 정도를 기준으로 미래 환경을 예측한 시나리오로 총 네 가지(RCP2.6·RCP4.5·RCP6·RCP8.5)가 있습니다. RCP8.5는 4개 시나리오 중 가장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미국 서부 산불·폭우 전망.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제공

◆“미국 서부, 80년 내 산불-폭우 재난 최대 8배↑”

 

연구결과, 산불-폭우 연계 재난이 2100년까지 태평양 북서부 연안 지역에서 8배, 캘리포니아는 2배, 콜로라도에서는 약 50% 증가할 것이라 전망했습니다. 대형 화재 사고의 10건 중 9건 비율로, 같은 지역이 5년 이내 최소한 세 차례 이상 폭우 피해를 볼 것이라는 예측도 내놨습니다.

 

이런 산불-폭우 연계 재난의 증가 전망은 기후변화로 인해 산불이 일어나기 쉬운 날씨가 더 자주 나타나는 데다 극단적인 폭우 또한 그 빈도가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온실가스 증가가 온난화를 진행하는 동시에 대기순환 패턴을 변화시키는 데 따라 이런 조건이 형성된다는 겁니다.

 

다만 이런 전망이 그대로 현실화될 거라는 건 아닙니다.

 

이번 연구가 가정하고 있는 기후위기 시나리오 RCP8.5의 현실성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소 미비할 수는 있지만 현재 전 세계가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위한 움직임을 다방면으로 전개하고 있는 데다, 많은 과학자 또한 RCP8.5에 대해 순수하게 이론적 차원에서 설정한 극단적 가정으로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 의견을 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연구를 진행한 이들도 마찬가지로 연구결과가 그대로 실현될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아도 된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기후위기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는 이상 산불-폭우 연계 재난 가능성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입니다.

 

연구에 참여한 미 국립대기연구센터 다니엘 투마 수석연구원은 RCP8.5보다 실현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를 적용하더라도 태평양 북서부 연안 지역에서 발생하는 산불-폭우 연계 재난이 4배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018년 1월 폭풍우와 산사태가 닥친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테시토 지역에서 구조대원이 생존자를 찾고 있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대형 산불’ 울진·삼척도 올여름 산사태 피해 우려 

 

우리가 산불-폭우 연계 재난에 주목해야 하는 건 결국 그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재난이 짧은 간격을 두고 연달아 발생하는 데 따라 그 지역사회가 ‘이중고’를 겪을 뿐 아니라, 산불 자체가 폭우로 인한 피해를 심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토사를 붙잡고 있던 나무나 풀이 산불로 타버리는 데다 땅 표면에 재로 인해 물 흡수가 잘 안 되는 발수층이 형성돼 산사태 가능성이 커진다는 겁니다.

 

미 서부의 산불·폭우 연계 재난 연구에 참여한 미국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대학(UCSB) 기후과학자 사만다 스티븐슨은 “연속해서 발생하는 두 번의 재난은, 첫 번째 재난에 이미 휘청이는 상태이기 때문에 더 심각한 피해를 낳는다”며 “더욱이 산불은 식물을 태우고 토양의 특징을 바꿔 심각한 폭우 피해가 발생하는 데 좋은 조건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2018년 1월 초대형 폭풍우가 닥쳐 발생한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테시토 지역 대형 산사태는 이런 산불-폭우 연계 재난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산사태가 발생하기 불과 한 달 전 같은 지역에 초대형 산불이 발생해 어렵게 진화됐던 터였습니다. 당시 몬테시토 산사태로 숨진 인원은 23명이나 됐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2000년 동해안 산불 2년 뒤에 찾아온 태풍 ‘루사’로 강원 지역 산불피해지가 일반산지보다 약 10배 많은 산사태 피해가 발생했다는 국립산림과학원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더욱이 올 3월 초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 강릉, 동해에서 역대 최장인 213시간이 걸려 진화된 대형 산불이 발생한 터라 올여름 장마철이 시작될 경우 이 지역 산사태 발생에 대한 우려가 높은 상황이다. 산림청은 최근 토양 유실 등 2차 피해 우려가 있는 지역 대상으로 산지 사방(흙·모래·자갈 이동을 막는 일) 공사 등 산사태 예방사업을 오는 6월 장마철 이전에 마무리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당장 산사태 우려가 큰 주거 지역에 대해 토사를 막아낼 수 있는 보호벽을 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산사태 전문가인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나무를 심으면 당장 흘러가는 물을 붙잡는 양이 늘어나 산사태를 예방할 수 있는 효과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20년을 놓고 보면 우리가 막대한 재원을 들여 조림을 한 곳과 그러지 않은 곳이 나무의 양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면서 “차라리 산이 인접한 주거 지역 위에 딱 2m 높이의 보호벽을 쳐서 흘러내리는 토사가 비껴가도록 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 산사태 예방 대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