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시샘하나...은빛 서리꽃의 새하얀 질투/‘야생화 천지’ 만항재 거쳐 1500m 함백산 정상에서 만난 신비한 ‘하얀나라’/5억년전 만들어진 구문소와 삼형제 폭포 ‘감탄’/광부 애환 서린 물닭갈비 ‘엄지척’
해발고도 1572.9m. 헉헉대고 정상 오르자 기대했던 초록초록 봄내음 온데간데없다. 대신 온통 하얀 눈꽃과 서리꽃 활짝이다. 남도는 물론, 수도권까지 화사한 매화와 벚꽃이 지천인 따사로운 4월에 상고대라니. 역시 험준한 백두대간 맞구나. 강원 태백시 ‘야생화 천국’ 만항재를 거쳐 함백산 정상에 섰다. 스위스 알프스의 이름 모를 산자락인 듯, 봄꽃 구경하러 왔다 얻어걸린 신비한 봄 속 겨울 풍경에 넋을 잃었다.
■광부 애환 서린 태백 미식, 물닭갈비를 아십니까
따사로운 봄 햇살 쏟아지니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이 한껏 기지개를 켠다. 마침 날이 좋아 가볍게 차려입고 산들산들 부는 바람 즐기며 봄 맞으러 함백산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서울에서 출발할 때 섭씨 15도이던 기온이 태백시로 접어들자 3도로 뚝 떨어지며 한낮인데도 어둑어둑해진다. 불안한 기운이 엄습하더니 급기야 시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진눈깨비. 아뿔싸. 오늘 산행은 다 틀렸나보다. 날이 개길 기다려야 하니 금강산도 식후경, 우선 배부터 채우자.
연탄불에 굽는 한우와 더불어 태백의 대표 먹거리 물닭갈비를 골랐다. 현지 맛집으로 유명한 김서방닭갈비로 들어서니 정겨운 연탄난로에 올린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탄광산업이 번창하던 태백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풍경. 평균 해발고도 약 742m 고지에 형성된 태백시는 한여름에도 난로를 피울 정도로 서늘할 때가 많아 식당마다 연탄난로는 기본이란다.
식당 벽에 걸린 사진은 얼마 전 ‘식객’ 허영만 화백과 탤런트 김승수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돌판에 양배추를 넣어 달달 볶아 먹는 춘천닭갈비와 달리 태백은 육수가 넉넉한 물닭갈비를 즐겨 먹는다. 태백 광부의 애환이 서린 음식이다. 3교대로 8시간씩 탄광에서 일하고 나면 땅속 지열에 온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수분이 다 빠져 나가 버렸고 이에 국물이 넉넉한 음식이 절실했다. 일고여덟 정도 조원이 닭 한두 마리로도 푸짐하게 배를 채울 수 있도록 육수를 가득 붓고 야채와 사리를 듬뿍 넣어 먹은 게 지금의 물닭갈비로 남았다. 기대대로 커다란 전골냄비 육수에 닭고기와 라면·쫄면·우동 사리가 담고 그 위에 쑥갓과 냉이가 듬뿍 올렸다. 자글자글 끓기를 기다려 채소와 사리를 입으로 허겁지겁 밀어 넣으니 비강이 봄내음으로 가득 찬다. 새빨간 육수가 매워 보이지만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고 깊은 맛이 우러나 숟가락을 멈출 수 없다. 볶음밥이 화룡정점. 국물을 조금 남기고 채소와 김을 넣어 쓱쓱 비벼 먹으면 소박한 태백 미식여행이 완성된다.
■4월에 핀 절경, 상고대를 만나다
다음 날 오전 7시. 다행히 날이 맑다. 콩나물이 푸짐한 황태해장국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본격적인 산행에 나선다. ‘1500 고지’라는 엄청난 고도가 말해주듯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계방산에 이어 함백산은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금대봉∼매봉산∼백운산∼두위봉∼장산 등 대부분 1400m 이상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덕분에 산세가 거대하고 웅장해 백두대간 위용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험준하지만 등산 초보‘등린이’이나 노약자도 걱정할 필요 없다. 만항재까지 차로 오른 뒤 50분 정도면 약 3㎞ 거리의 함백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어서다. 만항재는 우리나라에서 포장도로가 놓인 고개 가운데 가장 높은 해발 1330m로, 지리산 정령치(1172m)나 평창과 홍천의 경계선인 운두령(1089m)보다 높다. 만항재 삼거리 쉼터에 주차하고 봄바람을 즐기며 걷는다. 함백산 정상 표지석 옆에 서자 일행은 “이게 모야!”라며 탄성을 쏟아낸다. 눈꽃과 서리꽃이 한꺼번에 활짝 핀 환상적인 풍경. 그저 “와∼”하는 감탄만 저절로 터져 나온다.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구름바다는 바람이 불면 잠시 걷힌다. 그때 드러나는 파란 하늘과 발아래 백운산에 줄 지어 선 하얀 풍력발전기가 상고대와 어우러지는 풍경은 매우 이국적이다. 신기하게도 정선 쪽 산들은 상고대가 아예 없고 함백산 주변만 하얗게 칠해져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보통 눈꽃과 상고대를 많이 혼동하는데 전혀 다르다. 눈꽃은 그냥 나뭇가지 위에 눈이 쌓인 것이고, 상고대는 습기, 온도, 바람이 밤사이 만들어내는 걸작으로 수목 측면에 달라붙은 얼음 알갱이다. 보통 늦가을에 많이 생기며 밤사이 만들어졌다 해가 뜨면 사라지기에 쉽게 보기 어렵다. 바람이 지나는 방향을 따라 일정하게 서리가 붙는데, 폭이 2㎝가량이나 되는 서리꽃을 직접 보니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다.
■구문소 힘찬 물줄기 낙동강을 이루네
산을 내려 태백 시내의 신기한 연못, 황지를 찾았다. 함백산 정상과 달리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져 봄기운이 완연하다. 황지는 낙동강 발원지로 한강 발원지 검룡소와 함께 태백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상지·중지·하지로 이뤄졌는데 둘레 100m가량인 상지 짙푸른 물빛이 예사롭지 않다. 상지에서는 가뭄이 들어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수굴에서 하루 약 5000t의 물이 샘솟는데 연중 섭씨 9∼11도를 유지한다니 신비롭다.
상지 주변에 황 부자의 재미있는 전설을 담은 스토리텔링 조형물 10개가 설치됐다. 욕심 많고 심술궂은 황 부자가 어느 날 탁발하러 온 노승에게 쌀 대신 외양간 쇠똥을 퍼부었고 며느리가 이를 보고 쌀 한 바가지를 몰래 주었다. 이에 노승은 집에 큰 변고가 생길 것이니 살려거든 자신을 따라오고 절대 뒤를 보지 말라고 전한다. 얼마 뒤 뇌성벽력이 치며 황 부자 집이 땅속으로 꺼졌고 황 부자는 이무기로 변했다. 노승을 따라가던 며느리는 소리에 놀라 그만 뒤를 돌아봤고 바위로 변했다. 이후 황 부자 집터에 맑은 물이 솟으며 황지가 됐단다.
전설은 차로 10분 거리인 구문소로 이어진다. 볼수록 신기하다. 높이 20∼30m의 거대한 기암절벽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그 사이로 황지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흐른다. 구문소 북쪽은 황지천, 남쪽은 철암천으로 구분한다. 황지천 백룡과 철암천 청룡이 낙동강 패권다툼을 벌였는데 백룡이 석벽을 뚫어 청룡을 이기면서 지금의 구문소가 생겨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구멍이 뚫린 하천이라는 뜻에서 ‘구멍소’로 불리다 구문소(求門沼)가 됐고 강이 산을 뚫고 흐르기에 ‘뚜루내’로도 불린다.
사실 구문소는 5억년 전 고생대에 황지천과 철암천 두 물줄기가 지하에 있던 작은 동굴에서 만나 오랜 세월 석벽을 깎으면서 지금처럼 커진 독특한 지형이다. 고생대 시기 바다였던 구문소 일대 절벽에서는 물결흔도 관찰된다. 또 삼엽충류, 완족류, 두족류, 복족류, 필석류 등 다양한 고대 해양생물 화석들이 대량 발견돼 지질학의 보고로 평가된다.
자세히 보면 구문소 아래 절벽에 한자로 “五福洞天子開門(오복동천자개문)”이라 새겨져 있다. 정감록에 나오는 얘기로 석문은 하루 중 자시(오후 11시~오전 1시)에 열렸다가 축시(오전 1∼3시)에 닫히는데, 그 시간에 석문을 통과하면 흉과 화가 없고 재난과 병이 없는 세상인 오복동천으로 들어간다고 뜻이다. 구문소 왼쪽 도로에도 석문이 나란히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석탄을 실어 나르려고 석벽을 뚫어 만든 터널이다.
이 도로를 지나 구문소 반대쪽으로 가면 무릉도원에 들어선 듯, 아름다운 절경이 펼쳐진다.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앞으로 흐르는 개울이 삼형제 폭포로 바뀐 뒤 기암괴석을 거느리고 구문소를 향해 장쾌한 물줄기로 흘러가는 풍경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옛사람들은 이런 신비로운 풍경을 보며 근처 어딘가에서 이상향을 찾길 간절이 소망했나 보다. 나도 소원 하나 빌어본다. 어서 빨리 코로나19가 사라지고 오복동천의 평화가 다시 찾아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