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한 스리랑카의 의료 현장 곳곳이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의료진들은 몇 주 안에 응급 의료 서비스마저 중단될 위기라며 의약품 부족으로 사망하는 환자 수가 코로나19 사망자 수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 사는 와산타 세네비라틴은 매일 필사의 ‘약국 여행’을 한다고 17일(현지시간) CNN과 인터뷰에서 밝혔다. 항암제의 한 종류인 토포테칸을 구해야 희귀소아뇌종양인 신경아세포종에 걸린 7살 딸을 살릴 수 있어서다. 그는 “몇 주 전만 해도 토포테칸을 병원에서 무료로 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 환자 가족이 민간 약국에서 알아서 구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 나라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며 “약이 없으면 아이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악의 경제난에 빠진 스리랑카에서 의료 시스템 붕괴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모습이다. 스리랑카 의료진들이 지난 2월부터 거리 시위를 벌이며 경고했던 일이 현실이 됐다. 의약품 품귀로 사망한 환자 수는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스리랑카의 코로나19 사망자 수인 1만6000명을 넘을 수 있다고 관측한다.
병원들은 아비규환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사는 의료 장비와 의약품이 심각하게 부족해 카테터(체내에 삽입해 소변 등을 뽑아내는 도관)를 재사용하라는 병원 지침이 내려왔다고 털어놨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의료 장비를 소독하는 데 쓰고 있다”며 “우리가 배운 모든 윤리 지침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어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라며 “내가 환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스리랑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캔디의 공공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그 역시 카테터를 재사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병원 중환자실에는 마취제도 부족해 앞으로 수술을 어떻게 할지도 고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앞으로 몇 주 뒤에는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 절반만 살아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장시간 정전으로 휴대전화 불빛에 의존해 수술한 의사도 있다. 그는 심장질환을 앓는 신생아를 수술하는 동안 정전이 발생해 휴대전화 불빛 두 대로 수술을 이어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발전기가 가동될 때까지 다른 의료진이 휴대전화를 들고 있어야 했다”며 “수술 부위를 봉합하기 매우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스리랑카의 의료난은 경제난의 연장선이다. 코로나19로 스리랑카 경제를 지탱하던 관광산업이 직격탄을 맞았고, 공급난과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이 겹쳐 물가는 급등했다. 2018년 69억달러(약 8조5000억원)였던 보유 외환도 올해 22억달러까지 줄었다. 급기야 지난 12일 스리랑카 중앙은행은 일시적인 디폴트를 선언했다. 그러면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이 제공되기 전까지 510억달러에 달하는 대외부채 상환을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다. 스리랑카 정부는 19일부터 6일간 IMF와 협상해 40억달러 가량의 구제금융을 지원받는다는 계획이다.
지난 13일 스리랑카 보건부는 의약품과 의료 장비 부족 문제를 인정하고, 세계은행(WB)으로부터 1000만달러를 지원받았다고 밝혔다. 또, 세계보건기구(WHO) 및 아시아개발은행(ADB)에도 자금과 의약품 지원을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의료진들은 전국 응급실이 수 주 내에 마비될 수 있다고 본다. 스리랑카 약사회의 아툴라 아마라세나 사무총장은 국제기구나 여타 나라들의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상황은 더 악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의약품 주문이 접수된다 해도 공급가 이동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또, 이달 초 스리랑카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보건부 장관도 현재 공석이다. 아마라세나 사무총장은 “신속한 결정을 내릴 권한이 있는 사람이 없다”며 “지금 상황에서 분명한 것은 사태가 더 악화할 것이라는 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