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전쟁발 ‘식량위기’는 기후 위기 대응 위협한다"

美매체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보도
“식량난 대응이 지속불가능한 농업 확대
반복되는 식량위기…근본적 전환 필요”
지난 1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 외곽의 한 들판에서 농부가 수확한 곡물을 옮기고 있다. EPA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사회에 세계 식량안보 위기감이 고조되자 유럽 일부가 자국 내 식량 생산 확대 등 대응을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기후 전문가들은 이런 움직임에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단기적인 관점에서 이뤄지는 식량위기 대책이 장기적으로 기후위기 문제를 악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19일 미국 과학매체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등에 따르면 전문가들 사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발 식량위기에 대한 대응이 화석연료 사용 증가와 지속불가능한 농업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런 식의 대응이 기후위기를 악화시키는 건 물론 오히려 식량위기를 심화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고조되는 식량난에 농업 확대 움직임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이달 초 ‘거대한 기아 위기’가 감지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식량위기에 직면한 인구가 코로나19 대유행 이전 약 1억3500만명에서 현재 약 2억7600만명으로 2배 이상으로 증가한 동시에 그 운영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매달 7100만달러(한화 약 876억원)를 더 투입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진=연합뉴스

데이비드 비즐리 WEP 사무총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예멘, 이집트, 레바논 등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에서 식량위기가 심화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이집트는 우크라이나산 곡물 의존도가 85%, 레바논은 81%에 이릅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세계 밀 공급의 30%, 옥수수 공급의 20%, 해바라기씨유 공급의 75∼8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국제구호단체 ‘머시코(Mercy Corps)’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케냐, 소말리에서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는 인구가 1300만명 이상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수치는 올해 계절 강우량이 평균에 못 미칠 경우 2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입니다.

 

더욱이 국제사회가 전쟁 이후 러시아산 에너지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는 제재 또한 식량 가격 급등을 이끄는 요인입니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채텀하우스’의 로라 웨슬리 선임연구원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와의 인터뷰에서 “극도로 높은 에너지 가격이 비료 가격 급등을 유도하고, 이는 곧 식품 가격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기후 변화 또한 올해 식량안보 위기를 더욱 가중시킬 수 있는 위험요인입니다. 데이터 전문기업 ‘그로인텔리전스(Gro Intelligence)’는 미국 중서부 가뭄이 봄철 밀 생산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가뭄 또한 해당 지역의 식량 수입 의존도를 증가시키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웨슬리 채텀하우스 선임연구원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고물가와 식량 불안을 가중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위협들은 사실 수년간의 식량에 대한 지속불가능한 생산과 접근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지난 9일(현지시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프리타운 내 시장에서 한 남성이 빵 쟁반을 머리에 이고 걷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시에라리온 등 아프리카 국가의 식량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런 차원에서 각 국가들이 식량위기 피해를 줄이고자 단기적으로 추진 가능한 정책들이 존재합니다. 그 중에는 무역 개방, 합성비료의 유기농 비료 교체, 음식물쓰레기 저감, 육류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식단 장려 등이 있습니다. 세계자원연구소(WRI)에 따르면 국가들은 기존 토지 농작물 수확량을 늘리고, 에탄올 같은 대체 연료에 쓰이는 곡물 양을 줄이는 방안도 택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이 옥수수 에탄올 생산에 사용되는 곡물을 절반으로 줄이면 우크라이나에서 손실되는 곡물 수출을 보상할 수 있다는 게 WRI 분석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각국 정부들이 단기적으로 식량·에너지 안보를 지키기 위해 장기적인 기후 대응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유럽의 일부 정책 입안자들은 농작물 생산량 증가를 위해 환경 보호 조치를 완화하는걸 검토하고 있습니다. 야누스 보세쇼스키 EU(유럽연합) 농업담당 집행위원은 “현재 전쟁을 고려할 때 연합 내 식량 생산을 늘리는 게 우선시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과 EU는 농작물 기반 바이오연료 사용 확대를 추진 중인 상황입니다.

 

◆“단기 위기 때문에 장기 목표 희생되면 안돼”

 

“가짜 이분법입니다.”

 

크레이그 핸슨 WRI 식량·산림·수자원·해양 부문 부소장은 ‘당장의 식량 위기에 대응하려면 기후위기 문제는 후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현 상황에 대해 “장기 목표를 뒤로 미루는 결정을 촉발시키는, 전형적인 단기 위기”라며 “단기적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장기 목표를 희생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채텀하우스의 보고서는 이런 목소리에 힘을 실어줍니다. 보고서는 식량 재배 면적을 늘린다고 해서 반드시 그 생산량 확대가 보장되는 게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특히 비료 가격이 지금처럼 계속 높게 유지된다면 그럴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겁니다. 더욱이 농업은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는 동시에 기후위기를 초래하는 온실가스 배출 부문 중 하나이기에, 농업 확대가 식량안보 위기 해소나 기후위기 대응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실제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23%가 농업과 임업, 기타 토지 이용에서 발생합니다. 또 대기 중 과도한 탄소를 흡수하는 숲이나 초원을 경작지로 일구는 경우, 이산화탄소 수백만톤이 방출돼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감소를 악화할 수 있습니다. 실제 네이처에 게재된 한 최신 연구는 지난 20년간 새 경작지의 약 절반이 자연 식물과 나무를 대체했다는 걸 확인한 바 있습니다. 

 

팀 벤튼 채텀하우스 환경·사회프로그램 부문장은 이번 전쟁과 같은 세계적 사건에 숲을 개간하고 자연을 경작하는 식으로 대응하면 “기후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후퇴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핸슨 WRI 부소장도 “식량위기가 기후문제에 대한 긴급성을 떨어뜨리고 농작물 경작지를 확대하는 잘못된 해결책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식량 위기 대응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이전까지 본 적 없는 재원이 농업에 투입되고 있고 그만큼 많은 생산물이 있지만, 지난 10년간 우리가 봤던 것처럼 기아에 시달리는 인구가 증가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걸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더 많이 생산하거나 투자하는 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차별, 소외 그리고 사람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 시장과 같은 구조적 원인이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겁니다.“(해리 버호벤 콜럼비아대 글로벌에너지정책센터 연구원)

 

그러나 지금과 같은 긴급 상황에서는 물량을 늘리는 식의 즉각적인 조치를 거부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다만 분명한 건 이런 접근이 망가진 시스템을 영구적인 상태로 이끌 수 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런 위기 상황을 계속해서 맞닥뜨리게 될 겁니다. 어느 순간에는 이런 반복을 깨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최악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하고 있는 일들이 실제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걸 깨닫는 게 필요합니다.”(웨슬리 채텀하우스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