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의 자녀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의식을 치렀다. 태반과 탯줄을 태항아리에 넣은 뒤 길지에 마련한 태실(胎室)에 봉안했다. 이러한 과정을 안태(安胎)라 했는데 왕실의 주요 의례로 엄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됐다. 왕실의 태를 봉안하고 석물을 조성한 과정을 ‘태실의궤’에 기록으로 남겼다. 태주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안녕을 기하려고 태를 소중히 여겼다. 훗날 태주가 왕이 되면 ‘더하여 봉안한다’는 의미로 ‘가봉(加封)’ 태실이라 부르고 별도의 석물과 가봉비를 세웠다. 태실이 있던 곳에는 태봉산(胎封山)·태봉리 등의 지명이 생겼다. 풍수학자 김두규는 “태실을 전국 도처의 명당에 조성해 왕조의 은택을 일반 백성까지도 누리게 한다는 의도가 있었다”며 “왕조와 백성 간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보자는 일종의 통치이데올로기였다”고 했다.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태실의 운명조차 기구했다. ‘문종실록’에는 “동궁(단종)의 태실을 성주 가야산에 옮겨 모시고 그 사역(四域)을 정했는데, 동쪽과 남쪽을 각 9600보(步), 서쪽을 9590보, 북쪽을 470보로 하여 표(標)를 세웠다”고 했다. 이어 ‘세조실록’에는 “예조에서 ‘성주 선석산에 주상의 태실을 봉안했으나 여러 대군, 여러 군과 난신 이유(금성대군)의 태실이 그 사이에 섞여서 자리했고, 법림산(가야산 자락)에 노산군(단종)의 태실이 있으니, 여러 대군과 여러 군의 태실을 옮기고 이유와 노산군의 태실은 철거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 태실이 조성된 선석산에 단종 태실이 복원됐지만 내부는 비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