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가 이건희의 집에서 만나는 모네 절정기의 ‘수련’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컬렉션 1주년’ 기념전 진행

신규 전시품 309점 등 모두 355점 전시
권진규 ‘문’이 영접, 백남준 ‘브람스’ 배웅
모네 말년작 ‘수련이 있는 연못’ 첫 공개
정약용 ‘정효자전’ 등 서예 2점도 압권
삼국시대 제작 국보 ‘일광삼존상’ 눈길

2만여 기증작 중 2%만 공개 갈길 멀어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이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언론공개회를 열고 이건희 수집품 355점을 공개했다. 참석자들이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을 보고 있다. 이재문 기자

“이 문을 지나면, 수집품이 가득한 저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저의 집을 소개합니다.”

한 컬렉터(미술품 수집가)가 친절하게 안내한다.



명과 암 사이, 복잡다단한 평가 속에서도 그는 분명 대한민국 사람들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동시에 보통 사람들은 가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사후(死後) 친절한 이웃이 돼 국민을 초대한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이건희 컬렉션(수집품) 기증 1주년 기념전을 열면서 이 특별한 전시장을 ‘한 수집가의 초대’라는 형식으로 꾸몄다.

◆기업인 아닌 ‘컬렉터 이건희’ 집으로의 초대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 수집가의 초대’ 전시가 최근 시작됐다. 지난해 7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시작된 이건희 컬렉션 첫 공개 이후 기증품을 소개하는 두 번째 전시다. 양대 기관과 광주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박수근미술관, 이중섭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이 기증받은 작품 총 295건 355점을 출품한다. 이 가운데 309점이 지난해 1차 이건희 컬렉션 전시 때는 없던 신규 전시품이다.

이번 전시는 관람객이 마치 어느 컬렉터 집을 초대받아 둘러보는 것처럼 꾸며졌다.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컬렉터가 자신의 집에 지인들을 초대해 작품을 보여주고 함께 감상하는 이벤트를 갖곤 한다. 이를 연상하게 되는 기획이다. 가상의 인물이라지만 그는 분명 이건희 회장이며, 그의 집에 방문한다는 상상으로 시작되는 낯선 친밀감부터가 색다른 경험이다.

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고인의 수집품은 호암미술관과 리움미술관에서 활용됐고 국내외 여러 기관 특별전에 출품됐는데도 여전히 ‘비장(祕藏)의 수집품’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며 “이건희 수집품을 향한 세간의 이해에 착안해서 ‘수집가의 집’이라는 개념으로 전시를 준비했다”고 소개했다.

◆하이라이트는 정약용·모네

한국 근대 조각 거장 권진규의 테라코타 작품 ‘문’이 손님을 맞이한다. 마지막은 비디오아트 거장 백남준의 설치작품 ‘브람스’가 배웅할 때까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 중 명작 아닌 것은 없다. 전시장은 예술의 힘과 인류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실거린다. 그 가운데서도 박물관 측은 하이라이트로 정약용의 서예작품과 모네의 회화작품을 꼽는다.

한 관람객이 정약용의 ‘정효자전’, ‘정부인전’을 감상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정약용 서예 두 점은 ‘정효자전’과 ‘정부인전’이다. 1811년 강진에서 유배 중인 처지에도 정약용은 이웃 한 가족을 위해 서예 작품을 남겼다. 강진에 살던 정여주라는 인물이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아들의 생전 효행에 대해 글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또 홀로 된 며느리가 자녀를 키우는 이야기도 기록으로 남겨달라 청했다. 이는 각각 ‘정효자전’과 ‘정부인전’이라는 기록이 된다. 두 작품 모두 비단에 먹으로 쓰였는데 실물 공개는 처음이다.

이 학예연구관은 “전해지는 정약용 작품 대부분이 주로 편지인데, 편지는 빠른 필치로 쓴 반면, 이 글씨는 작품을 위해 정자로 쓴 것이어서 정약용 필치 특징으로 꼽히는 균제미(均齊美·균형이 잡히고 잘 다듬어진 아름다움)가 잘 드러나 특히 작품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서양현대미술품 중 기증 당시부터 관심이 집중됐던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도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인상주의 화파 창시자인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 일생 중 절정기에 그린 그림이다.

모네는 대상을 똑같이 묘사하는 기존 구상화와 달리, 빛에 따라 달라지는 대상의 인상을 포착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낸 미술사의 인물이다. 1893년부터 1926년까지 자신의 장원 연못에 핀 수련 연작 약 250점을 제작했다. 1908년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고 이어 아내와 아들을 떠내보내며 작업을 하지 못할 정도로 좌절했다. 절망을 딛고 다시 수련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때를 모네의 부흥기로 꼽는다. 이번 전시에 나온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이 바로 이 부흥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화면에서 수평선이 없어지고 인상주의적 모호함은 더욱 깊어져 훗날 추상화 출현을 예고한 그림으로 평가된다. 모네의 이번 작품만큼은 비슷한 크기와 제작시기인 또 다른 ‘수련이 있는 연못’ 작품이 2021년 뉴욕 소더비 경매 기록이 있어 대략이나마 경제적 가치를 가늠해본다. 당시 낙찰가는 약 789억원(7040만달러)이었다.

◆귀중한 국보·보물

국가지정문화재도 다수 포함됐다. 국보 6건 13점, 보물 15건 20점 등 총 33점이 나왔다. 지난해 공개된 국보 정서필 인왕제색도와 함께, 새로 선보이는 국보와 보물은 불교미술과 전적 등으로 다양하다. 국보 ‘일광삼존상’(삼국시대 6세기)은 큰 광배 하나에 보살입상과 비구상 두 구가 배치된 불교미술품이다. 삼국시대 보살입상 특징이 잘 드러나고 보살의 신성한 기운이 섬세하게 표현된 명품으로 꼽힌다.

국보 ‘일광삼존상’

수양대군이 편찬한 석보상절과 1449년 세종이 편찬한 월인천강지곡을 하나로 엮어 만든 책인 ‘월인석보 권11’(조선1459년·보물), 불교 교리서인 ‘초조본 현양성교론권11’(고려11세기·국보) 등 시대를 초월한 지혜와 가르침의 집적물들도 만날 수 있다.

보물 ‘삼현수간첩’(1599년)도 빼놓을 수 없다. 조선시대 학자들이 글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눈 흔적 속에서도 깨달음이 현현해서다. 이 책 속 1581년 11월 송익필이 이이에게 보낸 글에는 “형님께서 대제학으로 임명되고 앞으로 재상이 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중략)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고 사소한 것이라도 이익을 도모하거나 공을 세우겠다는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라고 쓰였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들이 잘 보존돼 있다”며 ‘삼현수간첩’의 이 대목을 강조한 이 학예연구관은 “지금 공직에 들어서는 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이라고 말했다.

◆갈 길 먼 이건희 컬렉션

이번 2차 전시에 나온 신규 전시품 309점, 지난해 1차 전시에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개한 전시품은 127점. 여기에 광주, 대구, 강원, 제주, 전남지역 공립미술관이 받은 작품 102점을 합해도 지금까지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이름하에 전시된 총 작품 수는 538점이다.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은 총 2만3283점 가운데 약 2%에 불과하다. 기증받은 양대 기관은 아직도 기증품 확인, 등록 작업에 한창이다.

이재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쓴 글에서 ‘정보화와 관련해본다면 금속활자는 세계 최초의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글은 기막히게 과학적인 소프트웨어’라는 이 회장의 생전 말을 그의 수집철학을 보여주는 말로 꼽았다.

이 학예사는 “미술품과 문화유산은 단지 아름다운 감상물이 아니라 각 시대 최고의 기술과 철학이 집약된 결과물”이라며 “이건희의 수집활동이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호사가의 취미를 넘어 한국의 문화와 기술적 성취, 인류의 지혜를 보여주는 물건을 다각도로 수집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8월2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