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무너지는 책에 깔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재에 책이 쌓이고 쌓이다가 책장과 바닥은 물론이고 침실, 부엌까지 책의 홍수로 뒤덮이고 나서야 정신이 든 것이다. 며칠 고민하다가 과감히 책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안 쓰는 책’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구입한 지 오래됐지만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책이 첫 목표. 추리·스릴러 소설 몇 권이 바로 눈에 들어와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박스로 넣었다. 레이먼드 챈들러만큼 소설을 쓰는 작가가 드물다는 한숨을 쉬면서. 그다음엔 외부 사정에 따라 유효성이 다해버린 서적이 타깃이 됐다. 형법·형사소송법이 주로 이런 책들이다. ‘검수완박’이니 뭐니 하면서 지난 몇 년간 법이 누더기가 돼 더 이상 교과서의 기술이 의미가 없어졌다. 정치권력의 야합으로 자고 일어나면 제도가 바뀌니 이쪽 분야 책은 몇 년 뒤에나 새로 장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버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책도 있었다. 주로 철학 번역서들이다. 가격은 비싼데 중고서점에 팔려고 보니 헐값이고, 만약에 다음에 마음이 바뀌어 책을 다시 필요로 할 땐 몇 만원을 건네야 하는 책들이다. 이런 책도 고민 끝에 버리거나 중고서점에 팔기로 했다. 대학 강단의 전문용어는 더 이상 변화무쌍한 삶을 붙잡는 데 유효한 틀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주머니 사정이 쪼들리는 대학생·대학원생이 싼값에 손에 넣는다면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대형 중고서점들이 참으로 책값을 후려친다고 투덜거리면서 팔아넘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