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에서 간판 제작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요즘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최근 물가가 급등하면서 식당이나 카페, 술집 등지에서 가격 인상과 함께 메뉴판을 새로 제작하면서다. 지난 4일 찾아간 그의 작업실에는 가격을 인상한 메뉴판이 잔뜩 쌓여 있었다. A씨는 “지난해만 해도 메뉴판 제작 주문은 거의 없었다”며 “요즘은 하루 평균 4∼5건씩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는 “업종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식당이나 술집”이라며 “적게는 메뉴당 500원에서 많게는 1000원 넘게 올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A씨에게 메뉴판 제작을 맡긴 인근의 한 참치집 사장은 “이제 막 장사가 되려는 시기에 물가가 올라서 고민이 많았다”며 “식재료 가격이 워낙 올라서 어쩔 수 없이 가격을 전부 인상했는데, 손님들도 사정을 아는지 ‘왜 올렸냐’고 묻지도 않더라”고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로 한숨을 돌리나 싶었던 자영업자들이 고물가라는 새로운 악재를 만나 신음하고 있다. 식재료 물가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집밥이든, 외식비든 부담이 커진 건 소비자들도 마찬가지다.
8일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지난해보다 1.3%포인트 오른 3.8%로 전망됐다.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세와 수급 불균형 속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상하이 봉쇄령 등 연이은 악재에 따른 것이다. 문제는 물가 상승이 이제 시작이라는 전망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식용유 대란이 일면서 식당이나 술집 등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 사이에선 “비싼 건 둘째치고 수급조차 어렵다”는 아우성이 나온다. 당장 식용유 사용이 많은 치킨집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유명 치킨 프랜차이즈인 BBQ는 최근 올리브오일 가격을 15㎏당 12만원에서 16만원으로 33% 올렸다. 서울 강남구에서 치킨집을 운영하는 B씨는 치킨을 주문하면 함께 제공하던 양념소스와 치킨무를 이번주부터 각각 500원씩 받고 있다. B씨는 “재료값이 너무 올라서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라면서 “치킨값을 올리기는 손님들에게 미안해서 양념소스와 치킨무를 따로 팔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물가를 견디다 못해 점포를 내놓는 경우도 적지 않다. 8만명이 가입된 치킨집 관련 커뮤니티 ‘닭집닷컴’에는 점포를 넘긴다는 글이 하루 평균 20~30건씩 올라오고 있다. 물가 상승이 본격화되기 전인 지난달 이전에 올라오던 게시물의 2∼3배 수준이다.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은 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있다. 밥값을 한 푼이라도 아껴보겠다는 직장인들은 공공기관의 구내식당을 찾고 있지만, 이런 곳들마저 가격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일대 직장인들이 매일 수백명씩 찾는 국립중앙도서관 구내식당은 최근 가격을 4500원에서 5500원으로 1000원 인상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서울대 학생식당을 운영하는 학교 생활협동조합은 지난달 학식 세트메뉴 가격을 기존 3000∼6000원에서 4000∼7000원으로 1000원씩 올렸다. 공공기관 구내식당을 자주 찾는다는 직장인 박모(34)씨는 “조금이라도 아껴보자는 생각에 구내식당을 찾는데, 가격을 올린다니 부담스럽긴 하다”며 “그래도 일반 식당에 비하면 여전히 싼 편이라 계속 갈 것 같다”고 말했다.
독거노인이나 노숙인, 쪽방촌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급식소들도 식재료 값이 치솟으면서 골머리를 썩고 있다. 아예 반찬 가짓수나 배식 횟수를 줄이는 곳도 속속 생기는 중이다. 서울 강동구 행복한세상복지센터는 주당 3번 시행한 배식을 최근 주당 2번으로 줄였다. 센터 관계자는 “원래 밥과 국에 반찬 네 가지가 기본 구성이었는데, 물가가 너무 오르다 보니 고기류가 들어가면 반찬 4개를 맞추기 힘들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고물가에 따른 피해가 우려되는 사회적 약자나 취약계층에 대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과)는 “고물가·고금리 현상에 가장 먼저 노출되고 고통 받는 집단은 사회적 약자층”이라면서 “지난 2년6개월 동안 시장에 공급한 유동성을 금리나 물가 대책을 통해 회수하는 한편, 최저임금의 인상이나 근로장려금(ERTC) 편성 등을 통해 소득이 취약계층까지 수월하게 분배될 수 있도록 정책을 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