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4명.”
지난 3일, 전 배구선수 안은주(54)씨가 12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며 새로 기록된 가습기살균제 참사 공식 사망자 수다. 참사가 수면 위로 드러난 지 11년이 지났다. 가습기살균제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돼 징역 6년을 확정받은 신현우 전 옥시레킷벤키저 대표는 12일 만기출소했다. 그가 자유의 몸이 될만큼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피해 구제는 요원하다.
◆멈춰 선 법원의 시간… “인과관계 입증 어려워”
13일 법원에 따르면 가습기살균제 3·4단계 피해자가 가해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종 승소해 배상받은 사례는 0건이다. 정부는 참사 초기 제품 사용과 폐 손상 사이 인과관계를 따져 피해자들을 4단계로 분류했다. 이 중 인과성이 높다고 판단된 1·2단계 피해자들에게 주로 정부지원금과 가해 기업의 배·보상이 집중됐다.
3·4단계 피해자들은 피해 구제를 촉구하며 손배소를 제기했다. 인과성은 인정받지 못했으나 이들의 폐 손상이 경미한 것은 아니다. 고 안은주씨도 폐 이식 수술을 2번이나 받았지만, 3단계 판정을 받았다.
법조계에서는 3·4단계 피해자들에 대한 사법적 구제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실제 손배소 상당수가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은 상태로 5년 넘게 멈춰 있다. 3단계 피해자에 대한 기업의 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판결은 대법원 최종 판단을 2년6개월째 기다리고 있다.
3·4단계, 그중에서도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에 의한 피해자들에게 인과관계 입증은 ‘산 넘어 산’이다.
지난해 1월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는 “CMIT·MIT의 유해성과 폐 질환 사이 인과관계가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애경산업·SK케미칼 전 대표의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옥시 제품에 사용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의 경우 인과관계가 법원에서 인정됐지만, 애경·SK케미칼 제품의 주원료인 CMIT·MIT는 유독성이 PHMG·PGH보다 낮아 인과성이 쉽사리 인정되지 않고 있다.
환경·보건 사건 재판을 담당했던 한 부장판사는 “법리적으로 유해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 유해성이 인체 피해를 직접적으로 유발했다는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건 천지차이”라며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형사재판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설명했다.
서울고등법원에서 해당 재판의 항소심이 진행 중이지만 최종 판단까지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 알 수 없다. 지난해 5월 재판이 시작됐으나 재판부가 변경되며 10월 이후로 공판이 열리지 않고 있다. 얼마 전 형사2부에서 형사5부로 재판부가 재배당됐다. 새 재판부가 방대한 기록을 검토하는 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대법원까지 가게 되면 결론은 더욱 기약이 없어진다.
형사재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민사 손해배상 재판도 멈춰 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이정일 변호사(법무법인 동화)는 “민사재판은 덜 엄격한 증명을 요구한다 해도 형사재판에서 인정되지 않은 인과관계를 다르게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고, 손해배상에서 중요한 쟁점인 노동능력 상실률 등을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변호사는 “사참위(사회적 참사 특별 조사위원회)의 가습기살균제 조사 보고서라도 제출하고자 보고서 발표 이후로 재판을 미뤄 달라고 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사참위 보고서는 오는 9월 국회와 대통령에 보고된다.
◆특별법 ‘인과관계 추정’ 조항에 기대 걸지만…
환경부는 2020년 3월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특별법’을 개정해 피해자의 입증 책임을 대폭 완화했다. 개정된 특별법 제5조 ‘인과관계 추정’ 조항은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됐고, 그 이후 질병이 발생하거나 악화했으며, 그 둘 사이에 ‘역학적 상관관계’가 있으면 인과관계를 인정하도록 했다. 이 조항이 폭넓게 적용된다면 피해자들의 배상길도 대폭 넓어질 수 있다.
의료소송 전문 김용범 번호사(법무법인 오킴스)는 “역학적 상관관계는 쉽게 말해 ‘일반화’를 해 준다는 것”이라며 “개별적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해선 한 개인이 가습기살균제를 몇 시간씩,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서 흡입했는지 등을 다 증명해야 하지만 상관관계는 통계상 발병 확률 등 일반적인 연관성이 있으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상관관계를 통해 추정된 인과관계를 깨려면 기업 측은 개개인의 기저질환, 살균제 흡입 빈도, 체질 등을 일일이 조사해 반박해야 한다. 기업 측이 이를 뒤집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법조계 평가다.
아직까지 인과관계 추정 조항이 적용된 판결은 없다. 피해자들은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는 3단계 피해자 첫 손해배상 청구권 인정 사건에서 이 조항이 적용된 전향적 판결이 나오길 기대한다. 다만 이 또한 언제 결론이 날지 알 수 없다. 대법원으로 넘어간 지 2년이 훌쩍 넘었지만, 대법관들이 판결의 기초자료로 삼는 재판연구관들의 사건 검토 보고서조차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다.
◆“치료비만 수천만원… 배상액 500만원뿐”
“저희 가족 1년 치료비만 6000만∼7000만원은 됩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채경선(47)씨는 2009년 제품을 사용한 뒤 기관지확장증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 그의 남편과 자녀들 건강도 악화됐다. 1년에 드는 가족 치료비가 자신의 연봉 액수에 맞먹는다. 그나마 피해구제법이 개정돼 피해자로 인정받으면서 일부 지원을 받게 됐지만, 거액의 치료비로 인한 빚은 쌓여만 간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사법적 구제’에 대한 기대감을 접어 가고 있다. 3단계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처음으로 인정한 판결이 나왔지만 배상 액수가 500만원에 불과한 탓이다. 채씨는 “제 아들은 백혈병이 의심된다고 골수검사까지 받았다”며 “한 번만 입원해도 500만원이라는 비용으론 택도 없다”며 힘없이 말했다.
수원지법 민사7부(재판장 이원근)는 2019년 3단계 피해자 A씨가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사인 옥시레킷벤키저와 한빛화학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피고들이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에는 설계상·표시상의 결함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 A씨가 신체에 손상을 입었으므로 피고들은 제조물 책임법 제3조·5조에 따라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제조물 책임법 제3조1항은 ‘제조업자는 제조물의 결함으로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손해를 입은 자에게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다만 재판부는 A씨가 정부로부터 매월 97만원가량의 구제급여를 지급받는 점 등을 들어 청구한 3000만원 중 500만원의 위자료만 인정했다.
피해자들은 해당 판결이 상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현 사법적 구제의 한계를 보여 준다는 입장이다. 예컨대 재판부가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근거 중 하나는 신현우 전 옥시 대표 등이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형사 재판에서 유죄를 확정받은 것이었다. 이는 형사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SK케미칼·애경 등의 살균제를 사용한 피해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기업들은 형사에서 무죄가 나오면 손해배상 재판이든 조정안이든 ‘배째라’는 식으로 나온다”며 “형사 재판 무죄라면 민사도 패소할 게 뻔해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 성분 피해자의 경우 차라리 판결이 안 나오는 게 낫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