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당선" 선포한 윤일영 前 대법관·선관위원장 별세

1987년 12월 직선 대통령 선거관리 책임져
이듬해 1988년 4월 총선은 ‘여소야대’ 낳아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후 윤일영 당시 중앙선관위원장이 방송 카메라 앞에서 노태우 후보의 당선 확정을 선포하는 모습. MBC 방송 캡처

군부독재에서 민주화로 넘어가던 1980년대 후반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 16년 만에 국민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 그리고 헌정사 초유의 여소야대(與小野大)를 낳은 국회의원 총선거를 차례로 관리한 윤일영 전 대법관 겸 중앙선관위원장이 지난 15일 별세했다. 항년 89세.

 

1933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고인은 명문 광주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1956년 2월 고등고시 사법과 7회에 합격하며 법조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군법무관 복무 등을 거쳐 1961년 서울지법(현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되었다.

 

박정희정부 아래에서 서울지법이 서울민사지법과 서울형사지법으로 나눠진 뒤 고인은 1970년대 이 두 법원에서 차례로 부장판사를 지내며 사회적 이목을 끈 많은 판결을 남겼다. 민사지법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1976년 초등학교에서 양호교사한테 콜레라 예방접종을 받고 숨진 당시 7살 초등생의 부모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접종 부작용’을 인정해 학교 측이 부모에게 280여만원을 배상토록 판결한 것은 코로나19 백신 부작용 논란이 끊이지 않는 요즘 상황에서 눈길이 간다.

 

1980년대 들어 고법 부장판사(차관급)로 승진한 고인은 광주·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차례로 거친 끝에 1981년 4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판사(현 대법관)로 발탁됐다. 이는 5공 정권 출범 직후의 일인데 신군부가 사법부 물갈이를 위해 기존 대법관 상당수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고인을 비롯해 상대적으로 젊은 법관들이 대거 대법원에 진출했다. 고인과 함께 대법관에 오른 이로 훗날 노태우정부에서 사법부 수장을 지낸 김덕주 전 대법원장, 김영삼(YS)정부 시절 국무총리로 발탁됐다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회창 전 대법관 등이 있다.

 

고(故) 윤일영 전 대법관 겸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당시만 해도 대법관 임기는 5년이었다. 1986년 대법원을 상대로 또 한 차례 대규모 물갈이 인사가 단행됐고 이때 고인은 재임명된 반면 김덕주·이회창 대법관 등은 탈락했다.

 

대법관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선임자가 된 고인은 1986년 4월 중앙선관위원장을 겸하게 됐다. 군부독재 퇴진과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가 격렬하던 때였다. 결국 1987년 6·29선언으로 5공 정권이 헌법 개정 및 차기 대통령의 국민 직선 등을 받아들이며 정국은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고인이 중앙선관위원장으로서 책임지고 관리한 1987년 12월 대선은 노태우·YS·김대중(DJ)·김종필 4명의 후보가 뜨거운 경합을 펼친 끝에 노 후보 승리로 끝났다. 일각에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1971년 이후 16년 만에 부활한 대통령 직선제를 별 탈 없이 관리했다는 평을 들었다. 선거 직후 고인은 중앙선관위원장 자격으로 방송 카메라 앞에서 “유효투표 총수 중 최다수인 828만2738표를 얻은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자가 제13대 대통령 당선인으로 결정되었다”고 선포했다.

 

이듬해인 1988년 4월 총선에선 야당 바람이 일면서 평민·민주·공화 세 야당 의석을 합친 것이 여당인 민정당보다 많아 원내 과반에 해당하는 ‘여소야대’ 결과가 나타났다. 거대 야권의 사법개혁 요구에 떠밀려 노태우정부는 대법원장 등 교체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5공 때 임명된 고인의 입지도 불안정해졌다. 결국 고인은 1988년 7월 대법관 및 중앙선관위원장에서 물러나 재야 법조인이 되었다. 이후 1990년대 초 신생 헌법재판소 운영 개선을 위한 자문위원을 맡은 것 외에는 공직과 거리를 두고 평범한 변호사로 활동했다.

 

유족으로 아들 윤태식씨(부산지법 부장판사)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17일 오전 9시30분, 장지는 북한강공원. (02)2072-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