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 숙의보다 당론 우선시… 대화·설득 사라지고 꼼수만 난무 [심층기획-‘정쟁터’ 전락한 법사위]

각 상임위 법안 심사하는 ‘입법부 핵심’
진영논리 입각… 당론 관철에 ‘사생결단’

민주 ‘검수완박’ 강행 사보임 꼼수 동원
다수당 독주 막기 위한 ‘숙의’도 무력화
“성숙한 논의·협의의 과정 아예 사라져”

여론 떠밀려 법안 졸속 심사도 잇따라
음주운전 가중처벌 윤창호법 위헌 뭇매
지난 26일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고성과 막말, 다수당의 일당 독주에 안건조정위원회 무력화를 위한 꼼수 탈당까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현주소다. 한때는 대화와 설득으로 여야 법사위원들이 만장일치를 이루고 나서야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는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상임위였다. 다수당이라 해서 의석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일은 없었고, 소수당이라 해서 위축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딴판이 됐다. 사실상 국회 내 ‘상원’ 역할을 하는 법사위가 각종 꼼수가 난무하는 여야의 주요 ‘배틀필드’(전장·battle field)로 전락했다. 법사위 장악을 놓고 벌어지는 여야 갈등으로 21대 국회 후반기 원 구성 논의의 결론을 내지 못하면서 30일부터 원 공백이 현실화해 국회 기능이 마비됐다. 명예와 품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진영논리로 법안 처리

29일 정치권에 따르면 법사위는 고유 법안은 물론, 타 상임위에서 만든 법안의 체계와 자구를 심사하는 입법부 내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법안이 본회의에 상정되기 전 마지막으로 거쳐 가는 관문 격인 셈이다. 본회의에서 다수결 절차를 밟기 전 입법을 위한 숙고가 이뤄지는 사실상 마지막 회의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법사위는 ‘상임위의 상임위’ ‘상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상임위 성격상 법조인 출신 의원들이 다수 배치됐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10명 중 7명이 판검사, 변호사 출신이다. 국민의힘 소속은 6명 중 4명이 법조인 출신이다.

 

문제는 법사위의 법안 심사 기능이 각 당의 ‘당론’ 앞에서 무의미해지고 있는 점이다. 의원총회에서 당론으로 채택된 법안은 각종 부작용이 예상돼도 상대 당을 누르고 처리하려는 ‘사생결단’식 행태가 법사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법안 심사보다 당론이 우선시된다. 이에 맞선 상대 당은 결사 저지로 맞불을 놓으면서 법사위는 각 진영이 팽팽히 대립하는 싸움터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당의 ‘명령’을 받은 법사위원들이 숙의보다 진영 논리를 앞세우다 보니 의원들 사이에선 부작용이 예상되는 법안을 두고 ‘일단 법부터 만들어 놓고 나중에 고치자’는 말까지 오간다고 한다. 의원들의 ‘선당후사’ 정신이 사회 일반에 영향을 주는 법안의 졸속 처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민주당이 입법을 완료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이 대표적이다. 형사사건 처리가 지연되고 권력자 수사가 약화할 우려를 각계에서 제기했지만, 민주당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임기를 데드라인 삼아 군사작전 하듯 법안을 처리했다. 입법 과정에서 공청회를 통한 각계 의견 수렴 절차도 전혀 거치지 않았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진영 논리에 입각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법사위가 진정한 목표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며 “지금은 성숙된 논의를 아예 기대할 수 없게 돼 버렸다”고 우려했다. 김 전 의장은 “마지막엔 다수결로 하더라도 협의와 논의 과정은 꼭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민주당의 법사위 안건조정위 무력화 행보를 두고는 “법의 이름으로 법을 유린한 것”이라고 질타했다.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채진원 교수는 “당론을 따르지 않아 징계를 받고 탈당한 금태섭 전 의원 사례도 있지 않나”라며 “국회의원이 당론의 눈치를 보고 동질성을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힘 대 힘 대결로 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 야당 의원은 “당원들이 저토록 요구하는데 당이 외면한다면, 당은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해 무소속이 된 민형배 의원. 뉴시스

◆숙의제도를 ‘꼼수’로 무력화

다수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 마련된 숙의 제도는 다수당의 꼼수로 무력화했다. 민주당은 검수완박 입법 과정에서 쟁점법안을 최대 90일간 논의하도록 한 법사위 안건조정위를 ‘꼼수 사보임’ ‘꼼수 탈당’ 등으로 무력화했다.

한 의원은 “특정 정당이 의석수로 법안 처리를 강행한 사례는 여야를 막론하고 역대 국회마다 있었지만, 탈당과 사보임 같은 꼼수를 동원해 가며 제도를 무력화한 사례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했다.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숙의보다 당론을 우선시한다” “당론에 거역하면 곧 퇴출하겠다는 것 아니겠냐”는 비판이 나온다. 민주당 출신으로 복당을 희망했던 무소속 양향자 의원도 검수완박 입법을 계기로 복당 신청을 철회했다. 양 의원은 지난 19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지금의 민주당에는 제가 돌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민주당은 앞서 안건조정위 무력화를 위해 양 의원을 법사위로 사보임 시켰다. 하지만 양 의원이 협조하지 않자 민형배 의원이 탈당해 무소속 신분이 된 뒤 비교섭단체 몫 안건조정위원이 됐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안건조정위는 민주당 뜻대로 조기 종료됐다. 이로 인해 검수완박 법안은 법사위 전체회의에 이어 본회의까지 거침없이 올라갈 수 있었다.

양향자 무소속 의원. 뉴시스

국민의힘은 돌아갈 곳이 없어진 양 의원을 영입하기 위한 물밑 작업을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21대 국회 후반기 법사위원장을 국민의힘에 양보하기로 했던 민주당의 약속 파기가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둘러싼 여야 갈등과 맞물려 본회의 일정이 지연되는 바람에 후반기 의장단 선출도 덩달아 늦어지게 됐다.

한편 법사위는 여론에 떠밀려 법안 심사를 졸속으로 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지난 28일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결정을 받은 도로교통법 148조 2의 1항(일명 윤창호법)이 대표적이다. 이 조항은 음주운전 또는 음주측정 거부를 반복한 운전자를 일률적으로 가중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해당 법은 이미 지난해 11월에도 위헌 결정을 받았다.

사진=연합뉴스

일률적 가중처벌 조항은 입법 단계에서부터 문제로 지적됐는데,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망사고로 여론의 관심이 높아지자 국회가 졸속으로 일단 법부터 만든 결과다. 이 과정에서도 법사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