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메시지 새겨넣은 ‘궁궐 얼굴’… 영조 가장 많이 남겨

조선시대 현판의 세계

성리학 국가통치 이념 등 담아 걸어
건물 용도따라 크기·형태·색상 달라
바탕판 옻칠, 글씨 금박 최고의 등급
왕이 직접 쓴 ‘어제어필’은 권위 상징

교태전·강녕전 흑바탕 화재 무사기원
“왕실 수호” 경복궁 4개 대문 무신作
일제강점기 궁궐 훼손…현판도 떠돌아
‘궁중현판-조선의 이상을 걸다’ 전시 개막식이 열린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효자로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관계자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진실로 중도를 지키라.’ ‘영원히 복을 누리는 곳.’ ‘생각을 떠올리면 환하게 나타나는 궁.’

때로는 정치의 도를, 때로운 바람이나 그리움을 담은 이 메시지들은 모두 조선 궁궐 현판들에 담겼던 의미다. 중국 고대 성군이 후대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도에 어긋날 수 있는 약한 마음을 경계하란 뜻으로 내린 구절에서 따온 ‘윤집궐중(允執厥中)’은 창덕궁 취운정에 걸렸다. 영원히 복을 누리는 곳이라는 의미는 고종 후궁이자 영친왕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처소로 쓰인 덕수궁 영복당(永福堂) 현판에 새겨졌다. 정조 후궁 수빈 박씨의 신주를 모신 궁궐 안 사당에 아들 순조는 생각을 떠올리면 환하게 나타나는 궁이라는 뜻을 담아 창경궁 현사궁(顯思宮) 현판을 걸었다.



현판은 각 궁궐의 이름이 됐고, 위치를 가늠하고 구분하는 일종의 주소가 됐으며, 메시지를 담고 알리는 게시판이기도 했다. 왕이 직접 쓴 ‘어제어필(御製御筆·왕이 짓고 왕이 쓰다)’은 그 자체로 위엄과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측은 “조선 궁궐 처마 아래 걸린 현판들은 건축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었다”며 “조선이 지향한 유교적 이상 사회 모습이 빼곡히 담겨있다”고 한다. 박물관이 최근 개막한 ‘궁중현판-조선의 이상을 걸다’ 전시를 통해 조선 현판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현판의 역사

박물관에 따르면 현판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돼 조선시대에 널리 쓰였다. 성리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이상적 정치는 성인 군주가 인과 덕으로 백성이 평안토록 하는 왕도정치였다. 현판 하나하나에는 성군이 지켜야 할 도리, 조선이 꿈꾼 이상사회와 국가의 존엄, 백성을 돌보는 덕치의 의지와 지침들을 담아 글을 짓고, 웅장한 궁궐에 걸맞게 꾸며져 높이 내걸렸다. 유교 경전이 토대가 됐다.

경복궁 중건 과정을 기록한 ‘경복궁 영건일기’(1865년) 기록에 남아있는 현판 기록이 흥미로운데, 교태전, 강녕전 등 각 전당 현판에 검은 바탕색을 칠한 이유가 ‘불을 제압하는 이치를 취한 것’이라 적혀있다. 오행 중 물에 해당하는 검은색을 써서 궁궐이 화재에 무사하길 기원한 것이다.

 

무신이 궁궐 현판을 쓰는 일은 드문데도 경복궁 4개 대문인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 현판만큼은 모두 무신이 썼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궁궐 바깥문에 무신이 쓴 현판을 걸어 왕실을 안전하게 수호하려는 의미였음이 파악됐다.

일제강점기 때는 궁궐과 함께 현판도 수난을 맞았다. 조선 왕실의 권위를 상징했던 궁궐들이 관광지, 오락시설, 박람회장으로 전락, 훼손되면서 현판들도 떠돌았다. 해방 후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전시됐다 1980∼90년대에 창경궁, 창덕궁 등에 옮겨져 보관됐다. 2005년에야 국립고궁박물관 개관과 함께 소장품으로 정착했다. 조선왕조 궁중 현판은 약 770점으로 이 중 고궁박물관 소장품이 755점이다. 현판 770점은 역사·건축·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지역목록에 등재됐다.

◆현판의 위계

현판은 글귀뿐 아니라 형태에도 모두 의미가 담겨있다. 궁궐 건물 위계와 용도에 따라 크기, 형태, 색상, 제작기법이 달랐다. 왕과 왕비 등이 공식적으로 쓰는 건물처럼 가장 격식이 높은 건물은 전, 다음은 당, 합이나 각, 현, 루, 실 등의 순으로 위계가 표시됐다. 바탕판 네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만들고 구름, 용머리, 봉황 머리모양 등 조각을 장식한 현판이 가장 위계가 높았으며, 테두리가 없는 널판형 현판은 위계가 낮았다.

바탕판은 옻을 여러 번 칠한 칠질을 최고로 하고, 먹을 입힌 묵질, 정분, 등을 사용해 흰색으로 칠한 분질 순으로 등급이 낮아졌다. 글씨 색은 금박을 붙인 것이 최고, 황색, 흰색, 검은색 순의 위계였다.

용도별로도 다양했다. 교훈적 내용 외에도 왕이 신하에게 내린 명령과 지침, 관청업무 정보, 소속 관리 명단, 국가 행사 등을 새겨 게시판, 공문서 기능도 했다. 왕실의 생활상이나 왕의 단상을 공유하는 매체 역할도 했다.

대안문 현판

◆주목할 전시품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크기로 눈길을 끄는 현판은 ‘대안문(大安門)’ 현판이다. 가로 374㎝, 세로 124.3㎝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중에서도 제일 크다. 덕수궁 동쪽에 위치한 정문에 걸려있던 것으로 ‘크게 편안한 문’이라는 뜻이다. 1904년 경운궁에 화재가 난 후 고종 명에 따라 1906년 대안문을 수리할 때 ‘큰 하늘’이란 뜻의 새 현판 ‘대한문(大漢門)’으로 교체됐다.

1582년 만들어진 ‘의열사기(義烈祠記)’ 현판도 놓쳐선 안 된다. 가로 150㎝, 세로 36㎝ 크기로, 백제 의자왕 때와 고려 공민왕 때 충신을 모신 사당인 의열사의 내력을 새긴 현판이다. 의열사는 1575년 홍가신의 건의로 세워졌고, 홍가신의 벗이었던 유성룡이 글을 지었다. 현판 글씨를 쓴 이는 조선 최고의 서예가 한호 석봉이다. 마모가 심하지만 현판 뒷면에 남은 음각 기록으로 석봉의 글씨임이 확인됐다. 최근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현판 중 가장 오래된 현판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조선 현판의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왕으로는 영조를 꼽는다. 5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가장 많은 어제어필을 남긴 왕이어서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현판 중 영조 현판이 85점으로 11%에 달한다.

이상백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 계기 글에서 “영조 어필은 일반적으로 현판에서 주로 보이는 공간 명칭보다 공식행사 후 남긴 생각, 근무자 독려, 아버지 숙종에 대한 추모 등 재위기간 왕이 겪은 다양한 삶의 흔적을 보여줘 주제도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특히 어필은 개인의 필적을 넘어 왕의 풍격(風格)과 위엄을 드러내는 상징물이자, 걸어두는 것이었기 때문에 왕의 글씨를 드높이는 데 적합한 매체였다”고 설명했다. 8월1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