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트로츠키와 야생란』 이장욱 "죽은 사람 더 많다는 한 생각,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이장욱 작가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는 풍경을 창문을 통해 바라보면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르쿠츠크로 간 뒤, 승합차를 타고 4시간 반 정도를 달려서 지상에서 가장 넓고 깊은 호수인 바이칼호수에 닿았다. 얼음이 녹는 여름이었다면 보트를 타야겠지만, 그때는 호수가 꽁꽁 얼어 있어서 빙상차를 타고 호수 안의 섬으로 들어갔다. 섬의 숙박 시설에서 2박3일 또는 3박4일 정도 지내다가 돌아오는 여행이었다.

 

여행이 끝나고 예매한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날, 호수의 섬에서 나와 공항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섬에서 뭍으로 나오는 마지막 빙상차가 그만 고장 나 버렸다. 비행시간을 맞추기 위해 호수를 걸어가라는 얘기를 듣고, 그는 아내와 함께 칠흑 같은 어둠과 영하 30도가 넘는 추위를 뚫고 바이칼호를 걸어 나왔다. 2015년 겨울이었다.

 

“어떤 것을 체험하거나 경험한다고 해서 곧바로 소설이 되는 건 아닙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제 안에서 화학 작용을 일으키고 다른 것들과 융합되고, 이런 과정을 거쳐 소설이 되더라고요. 이것도 실제 겪은 시기와 쓰인 시기가 좀 차이가 납니다.”

 

노어노문과 출신이어서 이미 러시아에서 1년 정도 체류 경험이 있던 그는 2015년 무렵 겨울밤 바이칼 호수를 걸어서 건넌 경험을 모티브로 하고 많은 상상들을 결합해 2020년 단편소설 「트로츠키와 야생란」를 써낼 수 있었다.

 

소설과 시 창작을 병행하는 작가 이장욱이 바이칼호수의 맹렬한 겨울밤 풍경을 극적으로 담아낸 「트로츠키와 야생란」을 표제작으로 한 소설집(창비)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이번 소설집에서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작인 「잠수종과 독」을 비롯해 2020년부터 2년 동안 쓴 아홉 편의 단편을 담았다. 각 단편에는 연인의 죽음과 관계가 있는 방화범을 치료해야 하는 의사(「잠수종과 독」), 죽은 클레오를 그리워하는 K(「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귀에서 나무가 자라는 친척이나 귀가 유독 예쁜 애인(「귀 이야기」), 걸핏하면 망상에 빠져드는 주인공(「노보 아모르」) 등 다양한 질문을 품고 있는 인물이 나온다.

 

정교한 서사와 빼어난 문학성을 추구해온 이장욱은 이번 소설집에서 독자와 무엇을 공유하고 싶었을까. 그의 문학은 앞으로 어디로 향해 갈까. 이 작가를 지난달 26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오랫동안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쳐온 만큼,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다.

 

먼저 표제작 「트로츠키와 야생란」은 주인공 ‘나’가 환경단체에서 모함을 당해서 그만둔 뒤 산에 갔다가 추락한 ‘너’를 몰락시킨 ‘그자’를 찾아서 계단에 밀치는 복수를 한 뒤에 러시아로 도망치면서 시작된다. 바이칼호수 섬 안의 트로츠키와 류다 부부가 운영하는 곳에서 생활하던 나는 마침내 너에게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 호수의 얼음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제목은 리차드 로티의 에세이 제목에서 따왔다.

 

“...기계적으로 나는 걸었다. 낯설고 익숙한 향기가 서서히 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전방을 노려보았다. 식물들이 얼음을 뚫고 피어오르고 있었다. 씨앗이 줄기가 되고 줄기가 가지로 뻗어가고 있었다... 얼음 위에 식물들이 점점 울울해지고 울울해져서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곧 거대한 숲을 이룰 것 같았다. 나는 그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무언가 깊고 치명적인 농담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108쪽)

 

―작품 속의 야생란은 여러 의미와 역할이 있는 것 같다.

 

“소설에서 어떤 반복적인 오브제를 쓸 때, 그것의 상징적 의미를 미리 정해두고 쓰지는 않는다. 오브제들은 감각과 직관의 측면에서 작동해야 한다. 오브제를 너무 도식화해 사용하거나 이해하면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역효과가 있다. 여기에서 야생란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구체적 사건, 장소, 시간 속에서 각각 다양한 맥락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령 산에서 발견한 야생란은 비극의 계기이지만, 집 안을 메운 식물들은 어떤 유폐의 풍경이다. 원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 발화하는 야생란은 와일드 오키드, 영화 제목이고. 트로츠키의 온실에 있는 식물은 또 다른 느낌일 듯하다.”

 

―작품 속에서 “도스토옙스키식의 장광설은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호수에 묻고 돌아가라고. 19세기 문학의 작가 정신이란 귀족이 되지 못한 백인 남성 작가들의 과대 포장된 피해의식에 불과하다고. 거기에는 인간 심연의 탐구를 빙자한 설교와, 하급 귀족 특유의 사회적 불만과, 계급투쟁의 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배어 있을 뿐이라고. 이제 그것은 유효기간이 끝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고.”(79쪽)하는 ‘너’의 소설관이 나오는데, 작가의 소설관은 무엇인가.

 

“인물의 말과 저의 소설관은 물론 다르다. 인용한 문장은 부분적으로 타당하지만 과장된 면이 있다. 밀란 쿤데라나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처럼 작가가 소설 속에 자신의 생각이나 정치적 견해를 그대로 이입시키면 에세이 소설이 된다. 그것도 나름 유니크 하고 매력이 있겠지만, 저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다. 제 관점이나 생각을 인물의 말에 그대로 투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소설의 매력이 휘발된다. 특히 인용한 문장처럼 사변적인 문장인 경우 인물, 캐릭터라는 매개가 더 중요해진다. 인물, 캐릭터, 사건 등의 매개를 통해서 무수한 각도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으니 소설은 때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일종의 분광기 같은 것이랄까.”

 

소설집의 첫 작품이자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작인 「잠수종과 독」은 교통사고로 숨진 연인 사진작가 현우의 사고와 연관이 있는 방화범 김정식을 치료해야 하는 의사 공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사적 복수도 가능한 공은 김정식의 목숨을 좌우할 주사기를 들고 서 있는데.

이장욱 작가

―작품은 어떻게 나왔는지.

 

“테러범을 살려야 하는 의사의 마음에서 시작된 소설이다. 대략 2, 3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그의 내면에는 수많은 모순과 갈등, 그리고 인간적 고뇌들이 있을 듯했다.”

 

―의료 현장이나 의사의 모습이 구체적이다. 디테일을 어떻게 확보했나.

 

“쉽지 않았다. 알고 있는 의사가 있어서 집필 과정에 여러 번 도움을 받고, 나중에 다시 디테일에 대해 감수를 받았다. 제가 알 수 있는 게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 번 검사를 받고 또 요청을 해서 다시 수정을 받고 했다.”

 

「유명한 정희」는 신경정신과 의사인 ‘나’의 어릴 적 친구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 군무원를 거쳐 업자가 된 뒤 큰 부를 이루지만 기독교를 거쳐 태극기부대가 돼 극단의 선택을 하는 곽정희를 그린 이야기다.

 

―곽정희 모델이 있는지.

 

“저의 경우, 현실의 모델을 염두에 두고 소설 인물을 구상하진 않는다. 현실에 실제 모델이 되는 인물이 있으면 아예 인물을 바꿔버린다. 곽정희 역시 실제 모델이 있지 않다. 곽정희의 경우 박정희 시대의 전형적인 캐릭터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곽정희라고 하는 인물 캐릭터의 내면이 더 중요했다.”

 

―나는 왜 잠수놀이를 하면서 돌연 곽정희에게 살의를 느끼게 될까.

 

“그건 저도 설명하기가 난감하다. 왜일까. 삶에서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갑작스럽게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는데, 그런 순간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의라고 하는 건 소설 속 인물이 느끼는 좀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우리가 애정을 느끼는 어떤 대상에 대해 갑작스러운 감정의 충동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런 것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 「혹자가 말하길」은 어릴 적 함께 놀던 혹자라는 친구가 갑자기 눈에 보이기 시작한 지우와 염의 이야기이다.

 

―어떤 계기로 쓰게 됐나.

 

“화장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열어보면 아무도 없을 때가 있다. 집 안에 어떤 존재가 돌아다니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느낌에서 촉발된 소설이다.”

 

―혹자가 실존한 사람인가, 아니면 유령인가 헷갈렸는데.

 

“혹자는 실제 친구였는데 두 사람에겐 유령적 존재로 등장한다. 현실과 유령적 존재의 중간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친구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데, 이를 거절하면 계속 마음에 남는다. 빌려줄 걸, 하는 마음이 남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라고 하는 소설적 캐릭터로 외화됐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이번 소설집에 죽음과 삶이 연루된 작품이 유독 많은 이유는.

 

“삶과 죽음, 기억의 문제는 저만의 소재나 주제라기보다는 문학 보편의 소재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 다룬 삶과 죽음 또는 기억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 소설들은 시대적 변화나 역사적인 문제들과 더 밀접하게 연관됐던 것 같다. 2010년대 이후 역사적인 흐름 같은 것들이 격렬하게 변화해 왔고, 이런 것들이 저도 모르게 반영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장욱 작가

이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그렇겠습니다. 세상에는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다보면 일상생활에 바쁘다가도 어이없이 한가해지고, 차가운 마음이다가도 세상 모든 것이 문득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습니다”(297쪽)라고 말했다.

 

학생 이장욱은 고등학교 시절 특별히 잘하는 게 없었다. 더구나 사람을 만나서 에너지를 얻기보다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 편이었다. 자연스럽게 혼자 끄적이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 일기도 쓰고 학급 신문에 기사 같은 것도 썼지만, 무엇보다 시를 썼다. 이것이 그의 문학 원점이 됐다. 시를 좋아하고 글쓰기가 흥미로웠던 그는 대학 문학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시와 소설을 함께 썼다. 시적 욕망도, 소설적 욕망도 있었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장욱은 2005년 장편소설 『칼로와 유쾌한 악마들』로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면 소설가로 등단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고백의 제왕』,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을,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천국보다 낯선』, 『캐럴』 등을 펴냈다. 문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 세계나 주로 천착한 주제나 내용이 있다면 설명해 달라.

 

“어떤 큰 주제를 가지고 쓰는 스타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구체적 세계 안에서 좌충우돌하는 과정들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하나의 정답을 가지고 소설을 쓰는 것에 기질적으로 반감을 갖고 있다. 기질적으로 단순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 단순화가 필요할 때조차 거부감을 느끼니까. 시나 소설을 쓴다고 하는 행위 자체가 제가 갖고 있는 큰 그림을 부서뜨리고 와해시키고 파편화시켜서 그것들을 서로 경합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소설을 쓰는 행위는 제 생각을 드러내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하고 해체된 세계 안에서 인물들이 서로 좌충우돌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삶의 감각이나 시선, 관점들이 서로 부딪치고 뒤섞이면서 충돌, 균열, 어긋남 같은 것이 발생하는 순간들을 느낄 때 소설을 쓰고 싶다.”

 

―소설 쓰기의 전략이나 방법이 있다면.

 

“소설마다 달라서 따로 원칙이나 방법이 있지는 않다. 습관도 특별한 게 없다.(글이 써지지 않으면) 야구 선수들은 슬럼프에 빠지면 예전에 좋았던 감각을 떠올리려고 노려하는데, 글쓰기도 마찬가지 같다. 옛날에 썼던 글을 읽기도 하고, 그때의 느낌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들은 영감에 의해 쓰기보다는 마감에 의해 쓴다. 시는 마감이 닥치면 초조해서 잘 안 되지만, 소설은 마감이 없으면 잘 안 되더라.(퇴고는 얼마나 하는지) 초고를 쓰고 다시 안 고친다는 일부 천재적인 작가들도 있는데, 저는 천재도 아니고 그런 스타일도 아니다. 시는 짧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긴 한데, 저는 시도 많이 고치는 편이다. 소설의 경우, 저는 초고와 퇴고의 투입 비중이 3대 7 정도 되는 것 같다. 퇴고를 하고 나면 초고와 완전히 달라지거나 아례 사라진 경우도 있고, 반대로 오히려 더 강해지는 부문도 있다. 저는 초고보다는 퇴고 과정이 좀 더 긴 작가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소설가로 활동하기 11년 전인 1994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시가 먼저 당선돼 시인으로 활동해왔다.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등을 펴냈다.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고려대 노어노문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고, 조선대를 거쳐 2014년부터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단에서 드물게 소설과 시 창작을 병행하고 있다.

 

“시는 수류탄 던지기에 가깝고, 소설은 길고 지루한 지뢰 매설 작업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때로는 둘 다 적군이 자기 자신이라서 당황하기도 하다. 시는 밤의 장르, 소설은 낮의 장르라고 비유하기도 하다. 실제로 밤낮을 구분해서 쓰는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시와 소설을 동시에 쓰면서 시와 소설이 이제 구분이 확실히 되는 것 같다. 소설에겐 좀 미안하지만, 소설이나 소설가는 직업의 이름이고 시나 시인은 직업이나 청탁과 무관하게 평생 쓰겠구나 하는 믿음이 있다. 시는 삶의 구체적인 생활 바깥의 글쓰기라며, 소설은 직업이라는 느낌이 있다. 시는 인간의 일이고, 소설은 소설가의 일이라는 느낌이 있다.”

 

당장 닥친 마감을 생각해야 하는 처지여서 장기 구상도, 죽고 나서 어떤 작가로 기억된다는 것도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늘 바쁘다. 왜냐하면 그는 ‘지루한 지루 매설 작업’(소설 쓰기)은 물론 치열한 대치 속에서 끊임없이 ‘수류탄 던지기’(시 쓰기)도 늘 하고 있으니까. 더구나 벌써 경장편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그것에 온통 사로잡혀서.

 

그러면서도 현장의 작가이기에, 그는 작가적으로 늘 걱정하고 고민한다. 벌써부터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고 걱정하고, 쓰고 나서는 또 강박적으로 쓴 글을 혐오도 할 것이다. 이렇게 후진 걸 누가 읽지, 이거밖에 안되나, 소설 정말 못 쓰는구나, 창피하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홀로 마시는 술 잔 속에서 도저한 자기혐오를 완화하고 최소한의 자기 애정을 상승시키면서 휘청휘청 걸어 나오는 그를 만날 것이다. 여전히 펜을 꽉 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