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아프리카 굶어죽어" 호소에도 푸틴 "…"

AU 의장, "왜 아프리카가 희생양 돼야 하나" 탄원
‘적반하장’ 푸틴 "서방이 제재 풀면 다 해결될 일"
유엔, "이러다 14억 ‘식량 난민’ 발생할 수도" 경고
블라미디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3일(현지시간) 남부 휴양도시 소치에서 아프리카연합(AU) 의장인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과 면담하고 있다. 소치=AFP연합뉴스

“아프리카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무고한 희생자들입니다. 러시아가 그들의 고통을 덜어줘야 합니다.”

 

아프리카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기구 아프리카연합(AU·African Union)의 의장을 맡고 있는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간곡히 호소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밀을 수입하는데 전쟁으로 밀 유통량이 확 줄어 국민들이 배고픔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에 푸틴 대통령은 최근의 글로벌 식량 위기를 러시아 및 벨라루스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재 탓으로 돌리는 태도를 고수했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은 “헛소리”라고 일축하는 가운데 특단의 대책이 시급히 마련되지 않으면 아프리카에 심각한 기아가 발생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AU 의장, "왜 아프리카가 희생양 돼야 하나" 탄원

 

3일(현지시간)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살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남부 휴양도시 소치에서 푸틴 대통령과 만나 아프리카가 직면한 식량난을 하소연했다. 보통 아프리카에서 소비되는 밀의 40% 이상이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다. 그런데 올해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흑해와 접한 우크라이나 주요 항구도시들을 봉쇄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수출길이 막혔다. 여기에 러시아의 돈줄을 끊으려는 서방의 매서운 제재로 러시아는 수출을 하기 힘든 상황이다.

 

당장 아프리카의 차드가 직격탄을 맞았다. 이미 차드는 국가적인 식량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유엔에 따르면 차드 인구의 3분의 1이 지금 당장 식량 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집트 곡창지대인 알사르키아에서 농민들이 수확한 밀을 옮기는 모습. 최근 곡물 가격 폭등으로 글로벌 식량 위기가 현실화하자 이집트는 서둘러 자국산 밀의 증산에 나섰다. 알사르키아=AP연합뉴스

AU 의장 자격으로 푸틴 대통령과 면담한 살 대통령은 “비록 우리 대륙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우리도 이 경제위기의 희생양”이라고 했다. 이어 “저는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식량이 부족한) 아시아, 중동, 중남미의 다른 나라들까지 대표해서 탄원을 드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면담 후 살 대통령은 “러시아 정부가 곡물과 비료 수출 완화를 약속했다”고 말했으나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이를 두고 아프리카의 호소에도 푸틴 대통령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 모든 위기와 혼란은 죄다 서방 탓”이란 종전 입장에서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는 얘기다.

 

◆‘적반하장’ 푸틴 "서방이 제재 풀면 다 해결될 일"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바다를 통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가로막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그러면서 최근 러시아가 장악한 마리우폴 등 흑해의 항구들을 통해 우크라이나 곡물의 안전한 수출을 보장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자발적 협조가 필요한 사항이다. 다만 러시아와 전쟁 중이고 더욱이 땅까지 빼앗긴 우크라이나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곡물이 인접국 벨라루스를 거쳐 육로로 서유럽까지 운송되는 방안도 대책으로 제시했다. 문제는 러시아의 동맹인 벨라루스 또한 서방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어 이런 식의 곡물 수출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결국 푸틴 대통령이 곡물 가격 폭등과 그에 따른 글로벌 식량 위기 책임을 전적으로 우크라이나 및 서방 측에 떠넘긴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BBC는 “러시아는 항상 아프리카 편”이라고 말해 온 푸틴 대통령이 정작 살 대통령과의 면담에선 아프리카의 식량 위기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조차 않았다고 날카롭게 꼬집었다.

 

지난 5월31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상점 진열대가 서방의 경제제재에 따른 수입 중단으로 물건이 없어 텅텅 비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AP연합뉴스

◆유엔, "이러다 14억 ‘식량 난민’ 발생할 수도" 경고

 

아프리카 국가 등 전 세계 개발도상국들의 식량 수급 사정에는 진작 ‘빨간불’이 켜졌다. 세계식량계획(WFP) 관계자는 BBC에 “현재 아프리카에서만 8000만명 이상이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며 “이는 1년 전인 2021년 이맘때 약 5000만명에서 크게 증가한 수치”라고 말했다. 유엔 관계자도 “우크라이나 항구들에 대한 봉쇄를 풀어 곡물 수출을 재개하지 않으면 전 세계적으로 기아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지금과 같은 곡물 부족 현상이 계속되면 지구 인구 약 14억명이 영향을 받는다”며 “자칫 이들이 ‘식량 난민’이 되어 국경을 넘는 대량 이주 사태가 촉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14억이면 중국 또는 인도 인구와 맞먹는 엄청난 숫자다.

 

서방의 일부 전략가는 “이것이 바로 푸틴이 원하는 바”라고 지적한다.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 등지에서 식량을 찾아 서유럽과 미국으로 유입되는 난민이 증가하면 화들짝 놀란 서방이 결국 대(對)러시아 제재를 풀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도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곡물 가격 폭등과 그에 따른 글로벌 식량 위기에 대해 “이것은 푸틴의 가격 인상(Putin price hike)”이라며 서방이나 우크라이나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일축했다. 하지만 11월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인들 사이에도 인플레이션에 대한 불만이 고조하고 있는 만큼 상당한 부담을 느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