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고 있어요.”
인천 서구에 사는 김지윤(60)씨는 매일 아침 전쟁을 치른다. 37세 발달장애인 아들과 맞이하는 아침은 수십년간 반복해도 버겁다. 발달장애인평생교육센터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실랑이가 벌어진다. 중증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 아들은 말을 하지 못해 의사소통이 불가능에 가깝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한다. 물건을 부수거나 길거리로 뛰쳐나가는 돌발 행동은 일상이다.
지난 3일도 그랬다. 센터에 가기 위해 김씨의 남편이 아들을 씻기려고 했지만 씻기 싫어하는 아들의 저항이 시작됐다. 아들의 키는 178㎝. 정신 연령은 영유아에 가깝지만 신체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 된 지 오래인 아들을 남편도 쉽사리 제어하지 못한다. 속상한 마음에 남편의 언성이 높아졌고, 아들의 몸부림은 심해졌다. 화장실에 있는 샴푸 등 물건들을 던지던 아들은 거실로 나와 식탁 위에 있던 물건들도 부수기 시작했다. 김씨가 말리려고 하자 아들은 김씨의 손을 깨물었다. 그의 손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남았다.
30분가량 지나서야 아들은 진정됐고, 김씨 부부는 이미 녹초가 됐다.
김씨는 “이런 일이 매일 반복되는데 그럴 때마다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다”면서 “112 신고도 자주 한다. 소음 때문에 이웃이 하기도 하고, 아들과 남편의 다툼이 심각해지면 내가 직접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만나기 싫고 무기력하다”면서 “이젠 나도 지친다. 인생살이가 싫어졌다”고 괴로움을 토로했다.
발달장애인 가족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장애를 가진 자녀와 사는 부모가 고단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생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잇따른다. 지난달 서울 성동구에서는 40대 여성과 6세 발달장애인 아들이 추락해 숨진 채 발견됐고, 지난 3일에는 경기 안산에서 홀로 20대 발달장애인 형제를 키워 온 60대 남성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최근 2년 동안 추산한 비슷한 사례만 최소 20건에 달한다.
12일 서울시와 서울시복지재단이 지난 4월 발표한 ‘고위험 장애인 가족 지원방안 연구’에 따르면 장애인 돌봄자 374명 중 35%가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거나 시도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36.7%는 우울·불안 등 정신 건강 문제를 겪고 있다고 했다.
◆몸도 마음도 무너지는 장애 가족의 삶
김씨의 삶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아들의 고등학교 무렵 때다. 더는 아들의 상태가 나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어야 했던 시기다. 그 전까지는 김씨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처음엔 아들의 말과 행동이 조금 더디다고 생각했다. 유치원에 갈 나이에도 발달이 늦자 병원을 갔고,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 같았지만 김씨 부부는 주저앉지 않고 아들을 위한 치료에 전념했다. 언어·운동·음악치료 등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검사는 끝없이 이어졌고, 약도 먹었다. 열심히 치료하면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증상은 더 심해졌다. 초·중·고등학교를 통합해 다닐 수 있는 경기 안산의 한 특수학교에 다니면서 치료를 이어갔지만, 아들의 돌발 행동은 더 잦아졌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막막함은 더 커졌다. 언제,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는 아들을 24시간 내내 돌보는 것은 오롯이 가족 몫이 됐다. 복지관과 주간보호센터 등을 알아봤지만 대기가 길고 중증 발달장애인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한 달을 다니고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다. 김씨는 “학교를 나오고 성인이 된 뒤 15년 넘게 여러 시설을 떠돌고 있다. ‘절망의 도가니’에 빠진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경제적으로도 내리막을 걸었다. 공무원이던 남편 월급으로는 병원비를 충당하기 어려웠다. 친정에 손을 내밀고 대출도 받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남편은 공무원을 관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형편이 나아지고 악화하기를 반복하다가 사업 실패로 부도까지 났다. 돌봄에만 집중하던 김씨는 3년 전부터 작은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남편은 사업 실패 이후 정신적으로 불안해 일을 못 하고 있다”며 “아들이 센터에 가고 활동지원사가 잠시 돌봐줄 때 편의점을 열고 있다”고 했다.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차가운 시선과 차별은 가족을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피폐하게 했다. 아들이 발달장애라는 이유로 집주인에게 거부당하는 게 다반사였다. 김씨의 큰딸은 주변으로부터 수도 없이 놀림당하며 자랐다. 그럴 때마다 김씨는 혼자 울음을 삼켰다.
김씨는 현재 우울증뿐 아니라 고령에 접어들면서 몸도 성한 곳이 없다. 쓸개를 절제하고 신장도 한쪽 떼어냈다. 입원해야 할 때도 있지만 아들을 돌봐야해 그마저도 어렵다. 김씨는 “우리 엄마들은 아파도 입원도 못 한다.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다”며 “매일 집에서 진통제만 쏟아부으며 버티고 있다”고 했다.
◆7살 발달장애 아들…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서울에 거주하는 40대 이모씨는 중증 발달장애인 아들을 키우며 우울증을 앓고 있다. 둘째 아들이 20개월이 지나도 잘 걷지 못해 대학병원을 찾아갔다가 발달장애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들었다. 이씨의 아들은 7세가 됐는데도 발음이 불안정하고, 숫자를 세지 못한다. 근육 발달이 더뎌 잘 걷지도 못한다. 아이가 나아지기를 바라며 여러 치료를 이어오고 있지만,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 우울증이 생기면서 남편과 갈등도 잦아졌고, 결국 이혼까지 했다.
남편에게 생활비를 일부 받지만 아이 치료비까지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두 자녀를 혼자 돌봐야 해서 고정적인 직장을 갖기도 어렵다. 이씨는 “사무 보조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도 하려면 일에 시간을 다 쏟을 수 없다”며 “예전엔 심리 상담을 받기도 했지만 이제는 돈도, 시간도 부족해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 고통은 더 커져서 아이들한테 짜증을 내는 등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울먹였다.
이씨는 여전히 아들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바보 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아이가 커서 어떻게 살지 불안하다”고 말했다.
◆“살고 싶다… 정보 제공·충분한 지원 못 받아”
부모들은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면서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충분한 지원도 받지 못했다고 입을 모은다. 발달재활서비스와 주간활동지원서비스 등 정부와 지자체가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수개월 이상 대기해야 하고 탈락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실제 보건복지부의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의 13.5%만 활동지원 등 생활지원서비스를 이용한 경험이 있었다. 이마저도 상당수가 하루 평균 3∼4시간이다. 김씨의 아들도 하루 2∼3시간만 활동지원서비스를 받고 있다. 중증장애인 아들을 활동지원사들이 꺼리는 경우가 많아 지원을 받기도 쉽지 않았다.
이씨는 자신과 아들을 ‘유목민’이라고 표현했다. 아들이 다닐 수 있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찾고 복지관 등에서 지원을 받기 위해 차로 수십분 거리에 있는 곳들까지 수소문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용하고 있는 발달재활서비스도 신청 후 6개월 지난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다. 여러 복지관을 찾았지만 “대기자가 많다”, “예산이 부족해 올해는 힘들다” 등의 답변이 이어졌다. 그는 “아무도 장애인 부모로 사는 방법과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검색하고 주민센터를 찾아가보지만 대기자가 많다는 이유로 못 받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이어 “국가의 도움이 더 확대되면 삶의 질이 훨씬 나아질 것”이라면서 “발달장애인을 낳아도 걱정없이 살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의 소중한 가족이고 사회 구성원이다”라고 강조했다.
장애인단체는 비극적인 사건이 반복되는 것을 두고 ‘사회적 타살’이라고 외친다.
발달장애인 아들을 둔 임현주(58)씨는 “(지원서비스) 정보를 찾는 것도 한계가 있다”며 “초등학교 입학할 때, 군대에 갈 때 통지서가 오듯이 장애인 가족을 위해 정부가 미리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장애인이 태어나면 부모가 돌봄을 ‘독박’ 쓴다. 부모도 사람인데 사회생활을 할 수 없고, 친구와 커피 한잔 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다”며 “장애인 돌봄 시스템을 강화할 수 있도록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애인 가족 요구에 맞게 서비스 다양화해야”
장애인 자녀와 그 부모가 함께 생을 마감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비극을 막기 위해선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12일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장애인 및 장애인 가족의 자살 예방을 위한 제도 개선 연구’에 따르면 장애인 가정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원인으로 △장애 인지·수용 과정에서 겪는 심리적 충격 △경제적 어려움 △서비스 미흡으로 인한 제도적 모순 △사회적 고립 등이 꼽혔다.
연구진은 “장애인 가족의 극단적 선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우울감, 경제적 손실, 대인 관계의 붕괴 등 개인적인 요소들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으나, 이런 요소들을 줄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장애와 관련해 발생하는 사회적 및 환경적인 요소들을 파악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애인 가족의 욕구에 맞게 정부와 지자체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다양화·전문화하고 촘촘한 사회 안전망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장애인복지관과 주민센터 등의 서비스 전달 체계가 세밀하게 구성돼야 한다. 또 중증장애인 중 24시간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을 대상으로 활동지원서비스를 확대하고, 활동지원사가 중증장애인을 기피하는 현상을 줄이기 위해 수당 차등 지급 등 유인책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연구진은 덧붙였다.
장애인단체도 이용자 특성에 따른 맞춤형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윤진철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사무처장은 “24시간 지원 체계가 모든 장애인에게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하루 최대 24시간이 필요한 장애인에게 어떻게 그 시간을 설계해 지원할지 국가 차원에서 고민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낮에 노동할 수 있는 발달장애인은 지원 고용을 통해 소득 활동을 하게 하고, 노동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장애인은 다른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낮시간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며 “저녁 시간에도 집에서 같이 붙어 있는 방식의 지원이 필요한 경우가 있고, 공과금이나 식사만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도 있다. 개개인의 삶에 맞춘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심리적 지원 등 발달장애 자녀를 둔 가족들을 위한 대책도 함께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서동명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발달장애인의 가족은 극심한 우울을 겪지만 정서적 지원은 과거부터 부족했다”며 “심리 상담 서비스를 강화하고 가족의 욕구에 맞는 여러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관련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장애인복지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7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장애인복지 예산 비율은 0.6%로 OECD 회원국 평균(2.02%)의 절반에도 크게 못 미친다.
◆“활동지원사 도움 받아 독립생활 축구경기도 직관… 사회인 된 느낌”
‘축구’. 장애인 거주생활시설에서 나온 후 어떤 점이 제일 좋았냐는 질문에 발달장애·뇌병변 중복장애인 권순철(44)씨는 망설임 없이 두 글자를 종이에 적었다. 권씨는 올해 들어 두 번이나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다녀왔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 이란전과 세계랭킹 1위 브라질과의 평가전을 직관하기 위해서다. 권씨는 “그런 외출은 장애인 거주생활시설에 있었을 때는 상상도 못 했었다”고 말했다.
지난 7일 서울시립발달장애인복지관에서 만난 권씨는 2014년 20년 넘게 이어온 시설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했다. 시설에서 나온 뒤 ‘체험홈’에서 자립의지를 가진 발달장애인 3명, 활동지원사 1명과 함께 자립을 준비하다가 2019년부터는 독립해 생활하고 있다.
권씨에게는 아버지, 누나 2명, 남동생 1명이 있는데, 모두 따로 지낸다. 대신 발달장애인 복지관과 활동지원사가 권씨를 돌보고 있다. 권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보라매공원 안에 위치한 서울시립 발달장애인 복지관으로 향한다.
복지관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태블릿 PC 사용법 등을 배우는 ‘컴퓨터 활동’, 공원을 걷는 ‘걷기 운동’, 트로트를 틀어놓고 신나게 춤추는 ‘방송댄스’ 프로그램 등을 소화한다. 이후 활동지원사와 동행해 장애인 콜택시나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는 규칙적인 일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권씨처럼 발달장애인이 시설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꼭 그의 가족이 장애인의 돌봄을 온전히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임현주(58)씨의 중증 발달장애인 아들 서지원(31)씨는 2년 전부터 ‘장애인 지원주택’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원주택은 공공임대주택이라는 주거공간에 더해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복지서비스를 맞춤형으로 지원하는 제도다.
서씨는 2011년부터 9년 정도 시설에서 생활하다 2020년 3월 폐렴을 앓게 되면서 시설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홀로 가족을 부양하던 임씨는 일을 그만둘 수 없어 주변에 상담을 요청하던 중 탈시설 지원 NGO단체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을 통해 장애인 지원주택을 알게 됐다.
서씨는 지원주택 서비스뿐 아니라 월 320시간의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도 받고 있다. 임씨는 “탈시설 후 아이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면, 아이는 말을 못하지만 활동지원사가 대신 전화를 받아서 ‘지원이 밥 먹고 있어요’라거나 ‘산책 중이에요’라면서 아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준다”고 했다.
임씨는 아들의 독립으로 ‘사회인’이 된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내 생활에 더 집중할 수 있으니 사회인이 된 것 같고, 기진맥진했던 삶이 다시 힘을 받고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공통된 소망인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덜하게 됐다.
모든 탈시설 장애인이 권씨나 서씨처럼 자립해 생활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시설 밖으로 나와 가족과 함께 지낸다. 임씨는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은 아이의 독립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며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제도적 지원이 미흡하거나 있더라도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임씨는 탈시설 후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로 장애인활동지원 시간 부족을 꼽았다. 서씨의 경우 현재 하루 11시간 정도만 지원을 받고 있는데, 활동지원사가 퇴근한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는 서씨 혼자 지내야 한다.
제도의 문제뿐 아니라 ‘부모가 끝까지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 영향도 있다. 하지만 임씨는 “부모도 나이가 들기 때문에 발달장애 자녀의 돌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때가 온다”면서 “언젠가 아이가 우리 없이도 살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매일 연습하며 준비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24시간 독박돌봄에 외식도 못해… 시설 입소 후 가족들 삶 달라져”
지난 7일 오후 경기 화성의 장애인 생활시설 ‘둘다섯해누리’. 중증 발달장애인 유재근(32)씨는 점심식사를 마친 뒤 야외 정원을 거닐었다. 유씨는 평소 잘 따르는 한 수녀가 나타나자 환한 미소를 보였다. 이후 함께 시설 내에 있는 카페를 찾아가 음료수를 마시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금형민 둘다섯해누리 사무국장은 “유씨는 이곳저곳 걷는 것을 좋아해 ‘자유인’으로 통한다”며 “시설에 있는 발달장애인들 개개인 성향에 따라 자신들만의 일과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2008년 문을 연 둘다섯해누리는 천주교수원교구 사회복지회가 운영하는 시설로, 60여명의 발달장애인이 생활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 생활재활교사, 언어치료사, 영양사 등 40명이 넘는 직원들이 일한다. 이곳에 머무는 이들은 대부분 중증 발달장애인이지만, 시설 내에 있는 실내체육관, 조리실습실, 목공실, 의료시설 등에서 관리·교육을 받고 다양한 활동에도 참여한다. 전체 시설 면적은 2500평 규모로 다른 생활시설에 비해 넓고 쾌적한 편이다. 입소 후에는 기간 제한 없이 계속 지낼 수 있다.
유씨는 13년째 이곳에 머물고 있다. 평일은 시설에서 지내고 주말에는 부모님이 있는 서울 자택으로 간다. 이숙영(63)씨는 1~2세 수준의 지능을 가진 둘째 아들 유씨가 특수학교를 졸업한 뒤 이곳으로 보냈다. 학교 졸업 후 집에서만 지내게 되자 24시간 ‘독박’ 돌봄을 감당하기 어려워져서다. 어릴 적부터 여러 치료를 이어왔지만 유씨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자해하거나 도로 한복판에 멈춰 서는 등 돌발 행동을 하는 일이 많았다. 유씨가 성인이 된 뒤 복지관 등의 도움을 받아보려 했지만, 대기자가 많아 거부당하는 일이 많았다. 유씨는 “아들의 미래가 걱정돼 잠을 잘 수 없는 날들을 보내왔다”며 “시설에 가족과도 같은 친구들과 헌신적인 선생님들이 있는 덕분에 아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생겨 다행”이라고 말했다.
유씨가 시설로 가면서 누나인 유선아씨의 삶도 달라졌다. 유씨가 학교에 가지 않는 방학이면 24시간 내내 가족들이 번갈아 돌보고, 선아씨는 동생의 괴성을 들으며 공부해야 했다. 선아씨는 “‘내 꿈을 마음껏 펼치고, 온전히 가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고 한다. 유씨가 시설에 가고, 선아씨도 독립하면서 비로소 자기 인생을 살게 됐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임용 시험에 합격해 특수교사가 됐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 6세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어릴 때 우리 가족은 외식 한번을 마음 편히 해본 적이 없다”며 “지금의 행복한 삶은 동생과 나도 각자의 인생을 살아서 가능했다”고 말했다.
유씨의 가족을 비롯해 시설에 발달장애인 가족이 있는 이들은 그동안 정부가 추진해 온 ‘탈시설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탈시설이 장애인 생활시설 축소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생활시설의 신규 개소를 금지하고 기존 시설 정원 수도 점차 줄이거나 폐쇄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미 일부 시설에서는 입소자 정원이 줄었고, 대기자가 수백명 이상인 곳도 있지만 더는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우리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치매 노인보다 더한 인지 장애를 겪는 경우가 많다”며 “시설이 열악하면 국가가 나서서 개선해야 하는데, 국가 책임을 방기한 채 오히려 없애려 한다”고 비판했다.
김현아 장애인거주시설이용자부모회 대표는 “상태가 심해 요양시설에 있어야 할 장애인을 자립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맞지 않다”며 “시설에 있는 장애인을 무조건 꺼내야 한다는 획일적인 조치를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질병을 앓고 있는 장애인을 위한 요양시설이나 집중지원시설 등 시설의 다양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둘다섯해누리를 운영해온 이기수 신부도 “탈시설을 무조건 반대하는 게 아니다”며 “벗어날 수 있는 아이의 자립은 충분히 지원해주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돌발 행동이 잦는 등 자립이 어려운 아이들에 대해서는 시설에서 관리를 받을 수 있게 돕는 게 맞지 않나”라고 지적했다.
◆“지원 서비스, 계획단계부터 가족 요구 반영해야”
장애인단체의 ‘탈시설 운동’이 시작된 후로 시설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측과 탈시설을 외치는 측이 대립구도를 형성한 것처럼 비쳐졌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돌봄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양측의 공통된 생각이다. 국가가 발달장애인의 돌봄을 책임지고 보장하며, 궁극적으로는 장애인이 가족 없이도 자립할 수 있도록 돌봄을 ‘탈가족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13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전국 1539개 장애인 거주시설에 2만9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평균 거주 기간은 18.9년이다. 복지부가 의사소통이 가능한 시설 거주 장애인 6035명을 대상으로 탈시설 욕구를 조사한 결과, 33.5%는 탈시설을 희망했고 59.2%는 시설에 머물고 싶다고 답했다.
시설 찬성 측은 중증 장애인의 돌봄을 가족이 오롯이 감당할 수가 없고 당사자 또한 시설을 원하는 경우가 있다며 시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면 시설 폐지를 요구하는 쪽은 시설이라는 제도 자체가 분리 정책에 가까운 차별이라며, 시설을 폐쇄하고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장애인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주요 선진국의 경우 장애인 지원 서비스를 계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장애인과 가족의 욕구를 반영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의 ‘장애인 가족 지원에 대한 국외 사례 고찰과 함의’ 보고서에 따르면 스웨덴은 모든 발달장애인에게 △활동지원서비스 △(장애 특성에 맞는 지원을 동반하는)거주서비스 △교육·고용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장애인을 위한 낮 활동 서비스 등 10가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장애인 지원 및 서비스에 관한 법’이 명시한 사회권에 따라 “좋은(쾌적한)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있도록 폭넓게 지원하고 있다.
영국은 지방정부의 사회서비스 부서가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을 직접 만나 이들이 요구하는 서비스가 무엇인지 직접 듣게 돼 있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 가족은 자신에게 필요한 지원을 고민하고 전문가에게 상담받을 기회를 얻는다. 지방정부는 장애 정도뿐 아니라 가족의 양육 역량과 환경까지 고려해 장애인과 가족이 서비스를 받을 필요가 있는지, 어떤 서비스가 얼마나 필요한지 등을 평가하고 관련 서비스를 지원한다.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민간기관, 자선단체 등을 통해 이들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게 노력할 의무를 갖는다.
한국에서도 지난달 법이 개정되며 2년 뒤부터는 최중증 발달장애인에게 일상생활 훈련, 취미생활, 긴급돌봄, 자립생활 등에 대한 통합돌봄서비스가 제공될 예정이다. 다만 ‘최중증 발달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하며 아직 관련 서비스 개발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발달장애인 지원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발달장애인의 삶을 설계하고 관리할 수 있는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종인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 이사장은 “발달장애인의 자활 및 재활을 상담하는 매니저가 있어야 하는데, 인력이 없다”며 “장애인과 그 가족의 삶을 어떻게 설계하고 지원할지 함께 고민해줄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