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본사/이희수/휴머니스트/3만9000원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상류 지역에 위치한 터키의 도시 샨르우르파에서 북동쪽으로 18㎞ 정도 가면 하란고원 정상부가 나온다. 이곳에는 주변보다 약 15m 높은 반경 300m 안팎의 널따란 언덕 같은 곳이 있다. ‘배불뚝이 언덕’이라는 의미의 ‘괴베클리 테페’이다.
1990년대, 한 농부가 이곳에서 밭을 갈다가 돌기둥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다. 돌기둥을 파내서 살펴보니 꽤 정교한 무늬가 조각돼 있었다. 돈이 되겠다고 판단한 농부는 이를 시장에 내다팔려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구조물들을 탄소연대 측정법 등을 사용해 분석한 결과, 아직 농업혁명이 시작되기 전인 약 1만2000년 전에 세워진 것임이 밝혀졌다. 이는 아나톨리아 중부에 위치한 차탈회위크나 이스라엘의 예리코보다 약 2000년이나 앞선 문명을 의미했다. 괴베클리 테페 유적은 신석기 시대 ‘언덕 위의 대성당’이었던 셈이다.
괴베클리 테페 유적은 약 1만 년 전 ‘농경의 시작과 정착-도시의 건설-문명의 형성’이라는 ‘신석기혁명’ 이론 패러다임을 뒤집는 놀라운 것이었다. 종교적 의례가 농경보다 앞선 문명의 시발일 수 있다는 가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터키 중부의 도시 코니아에서 동남쪽으로 52㎞ 떨어진 곳에서도 약 9500년 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기시대 거주지 차탈회위크가 발견됐다. 차탈회위크는 200여 채의 가옥이 있고 8000명 정도의 사람이 거주한 공동체 거주지로 드러났다.
터키의 국립이스탄불대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희수 한양대 명예교수는 책 ‘인류 본사’에서 아직까지 제대로 다뤄지지 못한 괴베클리 테페 유적과 차탈회위크를 비롯해 아나톨리아 문명이야말로 3000년 뒤에나 나타나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문명의 뿌리와 모태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그동안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하류 지역에 집중됨으로써 두 강의 상류지역, 즉 아나톨리아 지역이 거의 조망되지 못했다며 아나톨리아 반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문명사적 의미가 되살아나면 트로이와 히타이트, 프리기아, 페니키아, 아시리아, 리디아, 메디아, 페르시아,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 등이 좀더 실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교수는 먼저 ‘인류문명의 뿌리’로서 아나톨리아 지역을 비롯해 오리엔트-중동 지역을 집중 검토한다. 즉, 아나톨리아 반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인류 최초의 문명을 발아시킨 역사의 본토였고, 신화·문자·정치·기술 등 인류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인 문물들을 창조해낸 문명의 요람이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오리엔트-중동은 인간사회가 등장하고부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1만2000년 동안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온 지구상에서 가장 선진적인 중심지였고, 6400㎞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따라 동양과 서양의 정치·경제·문화를 이어주며 교류 발전을 주도한 문명의 핵심 기지였다고 분석했다.
저자는 이에 따라 초고대 아나톨리아 문명부터 히타이트·프리기아 등 고대 오리엔트 문명, 압바스 제국을 비롯해 7세기 이후 이슬람 왕국들의 역사를 거쳐 근대 오스만·무굴 제국의 성쇠까지 아나톨리아 반도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인도아대륙,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까지 아우르며 이 일대에서 일어나고 스러졌던 15개 제국과 왕국의 역사를 면밀히 추적해간다. 이를 통해 오리엔트-중동 세계의 1만 2000년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복원해낸다. 특히 그간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히타이트와 프리기아, 파르티아 등 오리엔트 고대 문명을 선명히 조명함으로써 끊어져 내려오던 인류사의 뼈대를 바로 세웠다는 평가다.
저자의 이 같은 시각은 세계사를 보는 패러다임 대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간 그리스-로마에서 출발해 중세-대항해시대-르네상스-종교개혁을 거쳐 산업혁명과 근대 문명으로 귀결되며 세계사(世界史) 이름을 독점했던 기존 서양사나, 균형을 내세우며 중국사가 독차지하다시피 한 동양사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리스-로마 문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저자는 그리스-로마 문명은 인류의 뿌리이자 모태인 오리엔트에서 뻗어나간 줄기문명이라고 평가한다. 즉, 그리스의 모태문명인 크레타 문명은 남쪽의 이집트문명과 동쪽의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종합 해양문명이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