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시위 현장이 달라졌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시위 건수가 다시 늘고 있다. 대통령 집무실이 위치한 용산이 새로운 ‘집회 1번지’로 떠오른 것도 배경이다. 정치적 입장이 정반대인 시위대가 펼치는 ‘맞불 집회’도 일상적 풍경이 됐다. 경찰의 ‘집회 금지’ 처분에 대해 법원이 제동을 걸고 있다는 점도 변수다. 내년 6월 의무경찰 제도의 완전 폐지를 앞두고 병력이 부족해진 경찰은 ‘소통을 통한 중재’에 방점을 찍는 모습이다.
4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개최된 집회·시위는 8만6552건으로 전년(7만7453건) 대비 11.8% 증가했다. 하루 평균 237건의 집회가 열린 셈이다. 집회·시위가 증가세로 바뀐 것은 2년 만이다. 2017년 4만3161건, 2018년 6만8015건, 2019년 9만5266건으로 늘어난 집회·시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2020년 들어 주춤했다가 지난해 다시 증가했다.
올해 역시 지난 4월18일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이후 집회·시위가 본격적으로 늘고 있다. 올해 초 월평균 2000∼3000건 수준에 불과했던 서울 시내 집회 신고 건수는 거리두기 해제(4월18일) 직후인 지난 4월20일부터 26일까지 일주일 만에 993건을 기록했다. 거리두기 해제로 많은 인원이 모이게 될 수 있었던 데다 새 정부 출범을 전후해 각계각층이 다양한 목소리를 분출하기 시작한 영향으로 분석된다.
◆‘용산’으로 무게중심 옮겼지만 ‘광화문’도 여전
눈에 띄는 것은 서울 시내 집회·시위 장소가 ‘용산’과 ‘광화문’으로 이원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청이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출한 ‘국방부 청사 반경 1㎞ 내 집회 신고 현황’에 따르면 거리두기가 해제된 4월18일부터 5월25일까지 용산경찰서에 신고된 집회는 272건으로 하루 평균 7.16건에 달한다. 기존에 집회 신고가 가장 많았던 종로경찰서에 접수된 집회는 같은 기간 총 167건이다.
청와대 인근에서 열리던 집회가 용산으로 옮겨간 데 따른 것이다. 실제로 지난달 28일에는 민주노총 전국철도노조 조합원 4000명(집회 측 추산)이 서울역에서 대통령실 앞까지 행진했다.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신경전은 여전하다. 대통령 집무실과 거주지가 분리된 초유의 상황을 맞아 집회 허용 여부를 법원에서 다투고 있다. 최근 2개월 동안 경찰과 시위대가 법원에서 맞붙은 게 5차례다. 경찰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규정하는 시위가 금지된 ‘대통령 관저 인근 100’에 대해 집무실과 사저 주변이 포함된다는 입장이지만, 법원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5월11일), 참여연대(5월20일), 민주노총(6월13일), 전국철도노조(6월27일), 민주노총(7월1일)까지 법원은 일관되게 “집무실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광화문 일대의 집회가 과거에 비해 줄어든 것은 맞지만 ‘집회 1번지’ 위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최근 종로경찰서에 신고되는 집회·시위 건수는 대통령 집무실 이동 전과 비교했을 때 80% 수준으로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종합청사, 평화의 소녀상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대사관이 있다는 상징성 때문이다. 광화문광장으로의 접근성까지 고려하면 앞으로도 대규모 집회·시위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아예 종로와 용산을 결합한 형태도 나타나고 있다. 민주노총이 지난 2일 광화문 세종대로에서 개최한 전국노동자대회에는 4만9000여명이 참가해 대통령 집무실까지 3.5㎞ 거리를 행진했다.
◆“같이 또 따로” 맞불집회 잇따라…“소통·중재 중요”
시위 방식도 바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 때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등 진보·보수 간의 거리가 확연히 멀어진 것을 계기로, 사안에 대한 입장이 다른 시위대가 동시에 등장하는 ‘맞불 집회’가 새로운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다.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인 단체들이 보복 심리 속에 집회를 펼치면서 사회적 갈등이 더욱 커 보이게 됐다.
최근 전·현직 대통령 사저 인근에서 잇따르고 있는 집회가 대표적이다. 5월부터 한 보수단체가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남 양산시 사저 앞에서 확성기와 스피커를 동원해 문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집회를 펼치자, 인터넷 언론사 ‘서울의소리’는 지난달 14일부터 윤석열 대통령의 서울 서초동 자택 앞에서 같은 방식의 집회를 열었다. 집회가 열리는 양산과 서초동 주민들은 소음에 따른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검수완박’을 둘러싼 찬성·반대 집회가 국회 앞에서 시차를 두고 열렸다. 정의기억연대의 정례 수요시위 역시 반대 단체들의 장소 선점으로 차질을 빚고 있다. 급기야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월 수요시위가 방해받지 않고 진행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보호가 필요하다며 경찰에 긴급 구제를 권고했다.
집회·시위 풍경이 바뀌면서 경찰도 대응 방식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특히 내년 6월이 되면 의경 제도가 폐지되면서, 한때 4만명에 달했던 의무경찰이 7700여명의 직업경찰로 구성된 기동대로 대체되는 상황이다.
경찰 안팎에서는 시위대에 대한 물리적인 대응보다 소통과 중재가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에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경찰대학 치안정책연구소는 ‘치안전망 2022’를 통해 “최근 집회·시위는 불특정 다수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지고 주최 측의 통제력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며 “주최 측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일반 참가자와의 소통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입 5년 차를 맞는 ‘대화경찰’의 역할 또한 확대되는 모양새다. 대화경찰은 집회시위 현장에서 집회 주최자나 참여자·시민·경찰 간 소통창구 역할을 해 평화로운 집회가 열릴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다. 지난해 한 연구에서는 대화경찰 투입으로 위법시위가 54.5% 감소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경찰청은 공공안녕정보국 정보관리과 산하 대화경찰 태스크포스를 오는 9월 대화경찰계로 정식 승격할 예정이다.
윤석열정부가 ‘법과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찰 또한 강경 대응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실제로 8일간 진행된 지난달 화물연대 총파업 기간 중 경찰은 운송방해 등 불법행위 혐의로 조합원 44명을 체포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코로나19 국면 속에서 양극화가 심화했고,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으면서 집회·시위가 분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며 “정책적 대안과 대화로 이를 풀지 못하면 결국 강대강 대립이 이어지면서 사회적 갈등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2021년 집회 소음 측정 4만1263건… 97% 기준 이하
지난달 14일 윤석열 대통령 자택인 서울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앞에 대형 확성기와 스피커가 등장했다. 인터넷 언론 ‘서울의소리’는 “문재인 전 대통령 경남 양산시 사저 앞 집회가 중단될 때까지 24시간 집회를 이어가겠다”며 양산 사저 앞에서 열리는 시위 소리를 확성기로 크게 재생했다.
경찰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정하고 있는 소음 기준치 65db을 상회한다며 이를 제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울의소리 측은 “이곳은 대로변이기 때문에 집회가 없어도 소음이 이미 65db을 넘는다”며 응하지 않았다. 실랑이 끝에 경찰은 71db을 기준으로 소음을 관리하기로 했다. 70db은 0.5m 정도 거리에서 듣는 전화벨 소리 수준이다.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의 몫이다.
아크로비스타 주민들은 지난달 22일 서초경찰서에 시위자들의 확성기 사용을 금지해 달라고 진정서를 제출했다. 입주민 총 720여가구 중 절반 이상인 약 470가구가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초서는 다음날 서울의소리 측에 오후 6시 이후 야간시간에 한해 스피커 사용을 금지하는 집회 시위 제한 통고를 했다.
4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집회 소음 관련 112 민원 건수는 2만2854건으로, 일평균 62건이 넘는다. 주민 신고 또는 경찰 직권으로 이뤄지는 집회 소음 측정 건수 또한 지난해에만 4만1263건(10월 기준)에 따른다. 2018년 8855건, 2019년 1만8016건, 2020년 1만9581건에 비해 급증했다. 그러나 이 중 96.6%인 3만9896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현행법이 정하고 있는 기준치 이하로 측정됐기 때문이다.
집시법 시행령은 시간대와 지역별로 다르게 소음 기준을 정하고 있다. 10분간 평균 소음값을 뜻하는 ‘등가 소음도’를 기준으로 주거지역에서는 주간 시간대(오전 7시∼해지기 전)엔 65db 이하가 허용된다. 과거에는 심야시간대(자정~오전 7시)에 60db까지 허용됐지만 2020년 시행령 개정을 통해 55db로 기준치가 낮춰졌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소음 측정 때만 확성기와 스피커 음량을 낮추는 방식으로 평균값을 우회할 수 있는 ‘꼼수’가 통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최고소음도를 기준(주거지역 주간 기준 85db 이하)으로 한 단속을 병행하고 있지만 이 또한 1시간 동안 3회만 넘지 않으면 되기 때문에 단속을 피하기 쉽다.
해외 주요 국가들은 우리나라보다 엄격하게 집회 소음을 관리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시는 주변 배경소음을 기준으로 확성기 사용을 규제한다. 주간(오전 7시∼오후 10시)에는 주변 배경소음 대비 5db, 야간(오후 10시∼오전 7시)에는 3db을 초과할 수 없도록 하는 식이다. 행진 등 이동 집회를 할 경우 소음원으로부터 10m 거리에서 측정할 때 81db을 초과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독일은 공업, 상업, 도시 지역 등 7개 지역으로 세밀하게 소음 기준을 나누고 있다. 순수 주거지역에서는 주간에도 50db 이상의 소음을 허용하지 않는다.
경찰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집시법이 개정될 가능성도 있다.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은 지난달 21일 기자간담회에서 “시민이 너무 불편을 호소하고 있어 타인의 주거권, 수면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관리할 수 있는 법령 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여야도 앞다퉈 집시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있다. 최근 2개월간 발의된 집시법 개정안은 총 7건에 달한다.
구희재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집회가 일상 속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음과 동시에 환경권에 대한 인식 고양으로 집회 소음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며 “국민 인식, 기술 환경 등 제반 여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집회의 자유 및 환경권의 적절한 조화를 위한 합리적 제도 설계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