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르더라고요. 아이한테 공부 개념 자체가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거죠.”
중학교 2학년 자녀를 키우는 A씨는 최근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얼마 전 치른 1학기 기말고사는 아이의 ‘첫’ 공식 시험이었다. 초등학교는 물론 ‘자유학년제’인 중학교 1학년까지 학교에서 시험을 보지 않은 데다, A씨가 사는 경기도에선 중학교는 기말고사만 보기 때문이다. A씨가 놀란 것은 시험 ‘결과’가 아닌 ‘준비 과정’이었다. 학교 시험이 처음인 아이는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나마 학원에 다니는 영어나 수학은 개념이라도 알고 있었지만, 과학이나 암기 과목은 뭘 배웠는지 기초조차 없었다. 충격은 교육제도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A씨는 “경쟁을 지양해 평가를 안 한다는데, 결국 사교육을 열심히 한 애들만 공부 습관이 잡히고 시험을 잘 보는 구조가 된 것 아니냐”며 “아이가 취약한 부분을 알 수 있게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시험을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험’은 교육에 필수불가결한 과정일까, 경쟁을 심화시키는 도구일까. ‘과열됐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한국 교육계가 체질을 바꾸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초등학생과 중학교 1학년을 중심으로 ‘무(無)평가’ 방침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런 경쟁 지양 기조가 학력을 떨어뜨렸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과열 경쟁을 막으려는 취지는 좋으나 아이들의 학업 수준과 기초학력 미달 학생 등을 파악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보수성향 교육감을 중심으로 ‘일제고사’라 불리는 전수시험 부활 의견이 나오는 가운데 최근에는 일부 진보성향 교육감들도 기초학력 신장 방안으로 평가 확대 카드를 꺼냈다. ‘학력 저하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고조된 것으로 보인다.
◆“시험 안 봐서 학력 저하” 비판 커져
18일 교육부에 따르면 현재 전국 대부분 지역은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지 않는 자유학년제를 운영한다. 자유학년제는 학생이 시험 부담 없이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로, 박근혜정부에서 1학기 동안 시험을 안 보는 ‘자유학기제’를 도입한 뒤 문재인정부에서 자유학년제로 확대했다. 2017년 경기·강원 시범 실시를 거쳐 2020년부터 전국 대부분 학교에 도입됐다.
현장에선 불만이 많다. 진로 탐색 효과는 작고, 시험이 없어 아이들의 학력만 저하됐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몇년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기초학력 저하 문제가 불거지면서 평가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우려가 더 커졌다. 결국 지난해 11월 교육부는 2025년부터 자유학년제를 자유학기제로 축소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중학교 1학년 중 1학기만 자유학기로 운영하고, 대신 3학년 2학기를 진로연계학기로 운영한다는 것이다. 세종과 경북은 지난해부터, 대구는 올해부터 이미 자유학기제로 돌아갔다. 경기 지역의 한 중학교 교사는 “1년 내내 시험을 안 보는 것에 대한 학부모의 불만이 코로나19를 계기로 더 커졌다“며 “정부도 이를 의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달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보수성향 교육감이 대거 당선된 것도 평가를 지양하는 진보성향 교육감들의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이 반영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전국 17개 시·도 중 보수성향 교육감이 당선된 곳은 8곳으로, 4년 전(3곳)에 비해 크게 늘었다.
8년 만에 보수 교육감이 당선된 제주에서는 김광수 교육감의 인수위가 최근 “내년부터 초 4∼6 대상 중간·기말고사를 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초등학생은 2011년 서울을 시작으로 각 지역이 중간·기말고사 등 지필고사를 폐지한 상태다. 제주에서도 2019년 완전히 폐지됐는데, 이를 되살린다는 것이다. 하윤수 부산교육감, 임태희 경기도교육감 등 다른 보수성향 교육감도 시험 확대 방침을 밝힌 가운데 최근에는 진보성향으로 분류되는 전북·전남·광주·세종 교육감까지도 평가 확대 방안을 내놓는 등 ‘무평가’ 기조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교육계는 반발하고 있다. 제주교사노동조합은 “시험이 학력을 신장한다는 정책은 전 세계적 추세에 반대된다. 교육방식이 10년 퇴보하는 것”이라며 “학부모와 학생 불안을 조장해 결국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제주지부도 “기초학력 보장은 진단이 아닌 지원이 핵심”이라며 “진단에만 몰두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교육계 “일제고사 부활 우려”
교육계에선 중간·기말고사 부활이 결국 일제고사 부활로 이어질 것이라 우려한다. 이명박정부는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를 전수조사로 확대하고 지역과 학교별로 결과를 공개해 일부 학교는 초등학생에게 밤까지 보충수업을 시키는 등 큰 부작용을 낳았다. 논란이 커지자 박근혜정부는 평가대상(초6·중3·고2)에서 초등학생을 제외했고, 문재인정부가 2017년 전체 학생의 3%만 평가하는 표집평가로 전환하면서 일제고사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최근 교육부는 학업성취도 평가 확대 방침을 밝혔다. 올해부터 초등학교 6학년이 다시 평가대상이 되고, 표집인원 외에 희망하는 학생도 시험을 볼 수 있다. 내년엔 초5·고1이 추가되고, 2024년에는 초3∼고2 전 학년이 평가대상에 들어간다. 결과는 학생과 학부모, 교사만 활용하도록 해 부작용을 막는다는 것이 교육부 방침이지만 일제고사 부활의 신호탄이라 보는 시선이 많다. 부산의 경우 당장 내년부터 모든 학교가 의무적으로 학업성취도 평가를 치른다고 발표했다. 사실상 전수고사가 된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대선 후보 당시 공약으로 “학업 성취도와 격차 파악을 위해 주기적인 전수 학력검증조사를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줄 세우기 평가 무의미” vs “기초학력 미달자 찾아 조기 개입해야”
일제고사 등의 평가가 학력 신장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갈린다. 최근 수학계 최고상인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학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일제고사 부활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학생이 학창시절을 공부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잘 평가받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며 “평가 방향과 방식이 유연해져야 한다”고 사실상 반대 의견을 밝혔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도 지난 15일 페이스북에 “허 교수 의견에 공감한다”며 “일제고사 방식의 획일적인 평가는 어떤 학생에게도 적절한 진단 방식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현재 방식으로 전수평가를 시행할 경우 얻을 수 있는 것은 저차원적 사고력 평가를 통한 기초학력 진단·보완뿐”이라며 “지식 암기식 학습을 강요하는 선다형·단답형 문항 방식에서 문제 해결 역량 평가 문항 방식으로 바꾸고, 초·중·고 각 단계에서 한 번씩만 시험을 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기초학력 미달 학생을 가리기 위한 객관적 평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평가는 교육의 일환이다. 얼마나 이해하는지 알아야 모자라는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며 “성취 수준에 도달 못 한 학생을 조기에 파악하고 개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진단은 필요하다”고 밝혔다. 배 교수는 “이명박정부는 평가 결과를 공개해 부작용이 있었지만, 결과를 해당 학교·교사에게만 알려주면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며 “서열화를 우려해 평가 자체를 막으면 더 큰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