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술로 만든 초음속 전투기 KF-21 ‘보라매’가 첫 시험비행에 성공했다. 김대중정부가 국산 전투기 개발을 목표로 제시한 2000년 11월 이후 22년여 만의 개가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 러시아, 중국 등에 이어 세계 8번째 초음속 전투기 개발 국가에 다가서게 됐다.
19일 방위사업청에 따르면, KF-21 시제기는 이날 오후 3시40분 제작사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본사 인근에 있는 경남 사천시 공군 제3훈련비행단 활주로를 이륙했다. KF-21은 33분 동안 기본 성능을 점검한 뒤 오후 4시13분 안전하게 착륙했다. KF-21은 경비행기 속도인 시속 약 400㎞(200노트) 정도로 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설계·제작 모두 국내 기술진 주도… 산업·안보 양날개 ‘활짝’
“2002년 T-50 훈련기의 꿈을 이루었고, 20년이 지난 오늘(19일) 우리는 기적을 이뤘다.”
국산 초음속 전투기 KF-21 ‘보라매’의 19일 첫 시험비행 직후 제작사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류광수 고정익사업부문장 부사장의 이 같은 소회는 국산 군용기 개발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첫 시험비행으로 선진국들이 기술 이전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전투기 개발 성공이 가까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KF-21이 산업·안보적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를 미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국내 기술 증진… 항공선진국 합류 ‘물꼬’
한국은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과 유럽에서 거액을 들여 군용기를 구매해왔다. 하지만 독자적인 군용기 설계 및 핵심 부품 제작 기술 습득은 매우 어려웠다. 선진국들의 엄격한 기술 이전 통제 때문이었다. 전투기 등을 자체 개발해 원천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연구개발비 8조8000억원을 투입해 인도네시아와 함께 개발한 KF-21은 이 같은 요구에 부응할 기반을 제공했다는 평가다. KF-21은 항공기 설계부터 제작에 이르는 과정을 국내 기술진이 주도했다. 국내에서 축적된 항공전자 관련 기술을 바탕으로 레이더, 임무컴퓨터, 전자전 체계 등 해외 제작사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핵심장비 대부분을 국산화했다. 4대 항공전자장비로 꼽히는 능동위상배열 레이더(AESA), 적외선 탐색 및 추적장비(IRST), 표적추적장비(EO TGP), 전자전 장비(EW Suite) 등도 국내서 개발한 기술에 기반하고 있다. 향후 양산 과정에서 추가적인 국산화가 이뤄질 예정이다.
장비와 부품 국산화 외에 항공기 운영유지 인프라 구축이 가능하다. KF-21이 제 성능을 발휘하려면 항공기 핵심장비와 부품 개발·생산·체계통합과 더불어 국내 정비능력까지 갖춰야 한다. KF-21을 개발·생산·운영하면 항공기 개발부터 운영유지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 적용되는 기술을 확보하는 효과가 있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한국을 항공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을 기반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대목이다.
◆공군력 증강 효과… 수출 경쟁력도 기대
KF-21은 이날 시험비행에서 기체 하부에 유럽 MBDA의 미티어(METEOR) 중거리 공대공미사일 4발을 장착했다. 미티어 미사일은 아시아에선 한국이 처음으로 운용하는 무기체계다. 한국 공군이 쓰고 있는 미국산 AIM-120 공대공미사일보다 우수한 성능을 지닌 미티어 미사일은 음속의 4배가 넘는 속도로 200㎞ 이상 떨어진 적기를 공격할 수 있다. 중국·일본·러시아 등 강력한 공군력을 운용 중인 주변국의 위협을 억제한 전략적 차원의 타격력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노후한 F-4·5 전투기를 교체하면서 공군력의 질적 향상도 꾀할 수 있다. 세계 전투기 시장에서도 KF-21은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다. 최근 세계 시장에서는 F-35처럼 스텔스 성능을 앞세우는 기종과 라팔·타이푼 등 강력한 공격력을 확보한 기종이 각광받고 있다. KF-21은 F-35보다 스텔스 성능은 낮지만, 현존하는 공대공미사일 중 최강으로 꼽히는 미티어 미사일을 탑재해 강력한 ‘펀치’를 갖췄다. 스텔스보다는 공격력이 우수한 전투기를 원하는 국가라면 KF-21이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다만 장거리 지상 공격력 문제는 보완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KF-21은 국내에서 개발될 공중발사순항미사일(ALCM)을 탑재할 예정이다. 기술적 난도가 상당한 ALCM이 실전배치가 이뤄지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있다. 수출 대상국이 미국·유럽산 미사일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ALCM만 해결되면 수출 경쟁력이 있다”며 “KF-21 탑재 수출용 장거리 공대지미사일 개발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제공호·KF-16 경험 바탕 기술력 축적
KF-21의 19일 시험비행 성공은 F-5, KF-16 전투기 생산과 T-50 계열 등 국내 항공기 개발 경험을 통해 축적한 기술이 집약돼 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19일 방산업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군용기를 만들려는 노력이 재개된 것은 1980년대다. 1980년대에는 미국산 F-5E/F 전투기 60여대를 국내에서 면허 생산했다. 이 기종이 ‘제공호’다. 비행거리가 짧고 전자장비 성능도 부족했지만, 기동력이 우수해 미그-19, 미그-21 등 북한 공군 전투기에 맞설 수 있었다.
1991년 차세대 전투기 사업(KFP)으로 도입한 KF-16 전투기는 공군전력 증강과 항공우주산업 진흥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미국산 F-16 전투기 120여대를 삼성항공(현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생산했는데, ‘국내에서 만든 F-16’이란 의미에서 KF-16으로 불렸다. KF-16 생산을 통해 국내 산업계는 4세대 전투기 제작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얻었다. 공군은 KF-16을 실전배치해 한반도 제공권 장악에 필요한 전력을 확충했다.
KF-16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국내 업계는 독자적인 군용기 개발을 시도했다. 1980년대 말부터 개발이 진행된 KT-1 기본훈련기가 1999년 양산되기 시작했다.
초음속 훈련기로 유명한 T-50은 1997년 미국 록히드마틴의 기술지원을 받아 개발에 착수했다. 부품은 32만개, 기체 내부 배선 길이는 15㎞에 달하는 T-50은 2003년 2월 초음속 돌파 비행에 성공, 2005년 8월부터 생산됐다. T-50은 디지털 비행제어시스템을 장착한 TA-50 전투입문훈련기, 지상공격능력을 갖춘 FA-50 경공격기,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를 위해 개발된 T-50B로 진화를 거듭했다.
T-50 개발에 성공한 한국은 KAI를 중심으로 4.5세대 전투기인 KF-21 개발을 진행했다. 2015∼2026년 인도네시아와 함께 추진하는 체계개발(블록Ⅰ)에 8조1000억원, 2026∼2028년 한국 단독으로 추진하는 추가 무장시험(블록Ⅱ)에 7000억원이 투입된다.
KF-21은 4.5세대로 개발됐지만, 군과 정부 당국의 장기 계획과 정책적 결정이 있다면 레이저 무기 및 인공지능(AI) 탑재, 무인 기술 등이 갖춰진 6세대 스텔스 전투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평가다.
공군은 KF-21 발전과 연계해 유·무인 전투비행체계를 확보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공군은 지난 5월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주관 토론회에서 2040년까지 KF-21에 제한된 스텔스 기능 등을 추가하고, 2041년에는 6세대 전투기로 도약하는 방안을 설명했다. 차기전투기(F-X) 2차 사업으로 F-35A 20대가 조기에 추가 도입된다면 KF-21의 추가 성능개량 대신 6세대 전투기 개발을 추진해 공군 전력 강화를 한층 빠르게 진행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