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자녀의 디지털 성범죄로 다급해진 양육자가 최근 급증했습니다. 누나의 샤워 장면을 몰래 찍는 등 집안까지 불법촬영 문제가 스며들었어요. 야만적이고 고질적인 성 문화가 디지털 플랫폼을 만나 손 쓸 새 없이 증폭됩니다.” (이명화 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장)
한국은 주요국 최하위 수준의 성평등지수와 정보기술(IT) 강국의 조합을 갖춘 나라다. 이런 사회에서 ‘디지털 성범죄’의 일상화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근 수년간 범죄 수위는 높아졌고, 가해·피해 연령은 낮아졌다. 특히 디지털 원어민 세대인 미성년자들이 디지털 성폭력에 연루되기는 너무 쉬워졌지만, 기성세대는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짚어보기 위해 디지털 성범죄·학교폭력 전문가 4명, 피해자 또는 피해자의 지인 4명, 일반 시민 2명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은 “범죄 인식이 현저히 부족한 가해 집단의 정서, 디지털 성폭력 매커니즘을 너무 모르는 사회, 왜곡된 남성성을 허용하고 부추기는 문화에 대한 정책적 대응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젊은 세대를 위한 ‘새로운 남성성’ 교육을 통해 이전 시대의 낙후된 남성성 개념을 대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남성은 ‘놀이’ 동참, 여성은 ‘생존’ 분투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정책연구실 양성평등정책연구위원 김홍미리 박사는 10대가 주로 활동하는 온라인 공간에 대해 “오프라인보다 훨씬 더 기존 성 규범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재단의 연구에 따르면 아동·청소년들은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 온라인 공간에 대한 안전감, 피해를 입은 후 감정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격차를 보였다. 남성은 디지털 성범죄를 ‘안다’고 생각할수록 심각성에 대한 동의도가 낮아졌지만 여성은 디지털 성범죄 정보인식과 심각성 인식이 동반 상승했다. 온라인에서 성적 침해를 경험한 뒤에도 남성은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48.5%)는 응답이 가장 많은 반면, 여성은 ‘불쾌하고 화가 났다’(73.8%)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여성의 17.5%가 느낀 ‘불안·두려움’은 남성의 5.8%만이 느꼈다.
뚜렷이 성별화된 특성은 10대 남성의 가해 확률을 높인다. 타인에 대한 성적침해의 주체가 되는 것을 폭력성·범죄로 인식하기보다 남성성·놀이문화와 혼동함으로써다. 김홍 박사는 “남성 아동·청소년이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선택지는 또래집단 내 성적 ‘놀이’에 뒤쳐지지 않는 것이기 쉽다”며 “남성의 성장 과정에 ‘왜곡된 남성성’이 개입될 때 여성 아동·청소년은 ‘성적 대상’의 위치에서 살아남기 위한 분투로 성장기를 보낸다”고 분석했다.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에 따르면 실제로 가해 청소년은 남학생이 96%인 반면 피해 청소년은 여학생이 68%를 차지했다.
디지털 성범죄 근절 활동 단체 리셋(ReSet) 역시 “10대 남성의 디지털 성범죄 상황에서 전반적으로 ‘유흥’ 혹은 ‘즐거움’이 느껴진다”며 “남초 사이트나 단체 채팅방 등 남성 공동체에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거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또래 피해자를 불법촬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리셋에 따르면 최근 학교폭력 피해자를 괴롭히기 위해 디지털 성범죄가 이용되는 경우도 종종 확인된다. 피해자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닫게 하기 위해 성착취물을 대량으로 보내는 ‘테러’를 모의한다거나, 학교 공식 SNS에 피해자의 불법합성물을 보내는 등 양상이 다양해졌다. 그럼에도 현 사회는 여전히 “가해자를 향한 메시지 전달을 두려워한다”며 “교육의 대상을 제대로 판단하고, 메시지를 전달할 때도 주저함이나 필터링이 없어져야 한다”고 리셋은 지적했다.
경기 군포시 A 고등학교에서는 메신저 단체 채팅방을 통해 학생 여러명을 상대로 반년 넘게 심각한 성희롱, 모욕을 한 사실이 지난달 알려져 충격을 줬다. 피해 학생들을 대리하는 한아름 법무법인 LF 변호사는 “어느 때보다 가해 학생들이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다”며 “단체 채팅방에서 여러 명이 문제적 발언을 주고받고 서로 호응하다 보니 ‘이게 허용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들을 준비 안 된 ‘무지한 어른들’
김홍 박사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의 가장 큰 문제로 “아무도 들을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것을 꼽았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이루어지는 범죄에 어떻게 개입할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른들이 매커니즘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 피해자들도 말을 꺼낼 수 없다는 것이다. “청소년의 ‘온라인 놀이터’를 사회가 안전하게 만들 책임이 있음에도 피해자에게 ‘너 왜 그러고 놀아?’라거나 ‘너 그런 애였어?’라고만 해 버리면 피해자들은 고립된다”는 설명이다.
10대가 성적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큰 장애물이다. 김홍 박사는 “문제 해결을 힘들게 하는 데 이런 양육자의 인식이 있다”며 “피해자 지원하시는 분들도 ‘내 아이가 이상하게 보인다’는 부모를 상담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피해 학생들은 부모가 피해 사실을 아는 것이 “가해자의 성착취만큼이나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이명화 센터장도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성관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충격을 받는다”며 “청소년은 온라인에 완전 노출됐는데, 학부모들은 전통적 가치를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대변되면서 양극화된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이는 시대에 맞는 성교육을 막고, 가해 학생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대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학교 내 어른들도 무지하기는 마찬가지다. 동료 교사가 학생에게 디지털 성폭력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고 밝힌 30대 교사 B씨는 “교사들조차 이 범죄가 사회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일탈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피해를 입은 교사 또한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닌데 왜 당했는지 모르겠다”는 등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 같은 기성세대의 무심함은 가해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된다. 리셋은 “10대 가해자들이 ‘들키면 큰일난다’면서도 ‘고소할테면 하라지’라며 범행하는 것은 사법부나 현 사회를 업신여기는 것”이자 “불법촬영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학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군포시 A고 단체 채팅방 성폭력 사건에서도 “단순하고 명확한 사건이 너무 어렵게 풀렸다”고 한아름 변호사는 지적했다. 성범죄로 볼 여지가 충분하지만 학교 측이 신속한 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동안 가해자들은 관련 증거를 삭제했다는 것이다. 한 변호사는 “일이 너무 진척되지 않자 학생들이 저를 찾아왔고, 법적으로 개입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처리되기 시작했다”며 “모든 피해자들이 변호사가 있는 게 아닌데 참 답답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이 사건은 뒤늦게나마 진행된 디지털 포렌식을 거쳐 학교폭력심의위원회에서는 10여명이 처분을 받았고, 경찰은 정보통신망법 모욕죄로 검찰 송치한 상태다. 군포경찰서 관계자는 “이미 학교에서 단톡방 대화를 다 지운 상태에서 디지털 포렌식을 할 정황을 확보해야 피의자 휴대폰을 압수할 수 있다”며 “이를 검토하는 데에 유사 사건들이 보통 세 달 이상 걸리기 마련인데 그에 비하면 이 사건은 빠르게 처리된 편”이라고 설명했다.
올 초엔 서울시 한 여자 고등학교에서 학생이 군 장병에게 쓴 위문편지가 논란이 되자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해당 학생의 신상 정보가 유출되고, 성적 모욕을 주는 합성 이미지와 게시글, 딥페이크 모의 글 등이 올라온 일이 있었다. 이에 해당 학교 학생 다수가 서울시교육청에 디지털 성범죄 신고를 했고, 시교육청은 피해 사례를 모아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이 사건은 수사 시작조차 되지 못하고 끝난 것으로 지난 15일 확인됐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사건을 맡은 서울 양천경찰서로부터 ‘대상자 인적사항이 성명불상으로 특정할 수 없어 수사를 진행할 필요성이 없어서 각하한다’는 통보가 와 있었다”며 “(수사 개시조차 하지 않은 것은) 잘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양천서 관계자는 “교육청에 다 설명했기 때문에 추가로 전할 내용은 없다”고 밝혔다.
◆‘남성성·시민성’ 교육 전면화해야
현재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은 남성성을 해친다’는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지 않고, 성평등 시대의 남성성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전 시대의 ‘낙후된 남성성’이 답이 아니라면서도 새 답을 빈 칸으로 남겨두는 사회는 사실상 남자 청소년들이 기존 문화를 답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김홍 박사는 “갈팡질팡하던 젊은 남성들이 그냥 형들 따라하면서 결국 안 좋은 문화를 배운다”며 “디지털 성범죄는 너무나 문제라고 여기면서도 ‘남자처럼 자라야 한다’는 것은 건들지 않는 사회에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무엇이 어디서 꼬였는지 찾아내야 할 정부조차 (페미니즘에 대해) 밟아버리고 있으니 이게 해결이 될 것인가 하는 우려도 있다”고 덧붙였다.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는 이런 관점에서 ‘남자청소년연구소’를 설립, 남학생 대상 성인지 성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의 이명화 센터장은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보는 환경에서 키워진 현실을 고려해 맞춤형 교육을 구성한 것”이라며 “프로문도(Promundo)라는 국제기구의 ‘맨후드 2.0’을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활용할 자체 프로그램을 별도 개발했다. 남 청소년의 생활 세계에서 이들이 힘들어하거나 인식 변화가 필요한 부분을 찾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 센터장에 따르면 기존 성교육은 ‘싫어요·안돼요·하지마세요’ 중심이라 남학생들이 성폭력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게 만든다. 2020년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성역할 고정관념, 남성의 틀에 갇힌 남성, 군대, 여성 할당제 등을 ‘남학생들이 팩트체크하며 지식과 진실을 탐험할 시간’을 준다. 교육 효과 분석 보고서를 보면 자신을 성적 주체라고 생각할수록 페미니즘을 이상한 것으로 생각했던 남학생들의 인식이 교육 이후 바뀌었다. 성평등 의식에서도 유의미한 효과가 나타났다.
김홍 박사는 “디지털 성폭력에서도 ‘위험해, 안 돼’ 같은 윤리·규범적 접근이 쉬운 길이지만, 사실 더 중요한 이슈는 남성 아동·청소년 교육을 전면화하는 것”이라며 “성평등을 말하는 시대에 태어난 남성들에게 인간다움과 남자다움 사이에서 성적 존재로서는 어떤 모델을 그려야 하는지 제시해 줄 교육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성교육을 넘어 사회화·도덕성에 이르는 ‘시민성 교육’이 필요하다는 진단도 나왔다. 리셋은 “현재 10대 디지털 성범죄자들이 보이는 인지·심리적 특성은 ‘인간성에 대한 전방위적 개선’을 필요로 한다”며 “‘피해자에게 공감하지 않더라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남성 시민을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여자 청소년들도 남성성의 재정의와 바람직한 남성성, 여성과 관계 맺는 남성을 판단하는 기준 등을 배워야 한다고 리셋은 덧붙였다. “남 청소년이 디지털 성범죄를 하지 않는 이유로 ‘쟤는 여자한테 관심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수준의 사회”이므로 “전반적인 성교육, 페미니즘 교육의 질 향상이 필요한 상황에서 남성에게만 진일보한 교육을 제공할 이유는 없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