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맴생이 띠끼랑께 나무에다 짬매나부러야’ ‘작년시안 게집머리로 솔찬니 보대께 부럿당께’.
전남 강진군 병영면 장강로 ‘와보랑께 박물관’. 전국 유일의 사투리 박물관답게 진입로 입구에는 호남 사투리가 적힌 팻말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그런데 한두 개 빼고는 도통 무슨 말인지 해석불가. 한참을 수수께끼 풀듯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데 백발이 성성한 ‘통역사’가 미소를 띠며 등장한다. “염소에게 풀 먹이라고 지시한 말을 듣지 않고 풀을 못 먹게 나무에다 묶어 놓았다고 질책하는 말이랍니다. 두 번째 팻말은 작년 겨울에 감기로 많이 고생했다는 뜻이고요, 하하.” 밝게 미소 짓는 그는 박물관을 설립한 김성우(75) 관장. 그를 따라 박물관으로 들어서니 ‘그때 그 시절’ 추억 돋게 하는 생활용품들이 가득하다.
#버려진 생활용품 모아 박물관을 열다
#예술 작품이 된 호남 사투리
3·4 전시장이 들어서니 창고 같던 생활용품 박물관과는 완전히 다르다. 서울 강남의 어느 화랑에 온 듯 번듯한 인테리어로 꾸민 화랑에는 독특한 그의 작품들이 걸려 있다. 바로 호남 사투리를 소재로 삼은 한글 그림 작품. 박물관 입구 나무 팻말에 적힌 사투리도 해석하기 어려운데 이를 그림 속에 숨겨 놓았으니 더욱 찾기 어렵다. 한참을 노려봐야 글자들이 점점 보이기 시작하지만 글자를 하나하나 찾아내고 이를 조합해 단어를 완성하는 과정이 퍼즐을 완성하듯, 아주 재미있는 도전으로 이끈다. ‘무담시’ ‘그랑께’ ‘냅두랑께’ ‘땡개붕거’ ‘그란다고 그래부러야’ ‘싸묵자고’ 등등 박물관 생활용품만큼이나 다양하고 정겨운 호남 사투리가 그림 속에 녹아 있다.
그런데 작품의 수준이 예사롭지 않다. 선과 면의 연결이 마치 유명한 추상화가의 작품을 보는 듯하다. 사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케치북을 늘 옆에 끼고 다닐 정도로 그림에 오랫동안 열정을 쏟아부었다. 1983년 첫 번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소묘집을 발간하고 광주전남현대작가회에 소속돼 여러 차례 회원전과 교류전 등에 참여한 중견작가다. “한 10년 전쯤인 것 같아요. 주로 풍경화만 그리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누구나 다 그리는 풍경화에 싫증이 났고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 들더군요. 고민 끝에 한글의 글자 형태를 가져와 변형한 뒤 선, 면, 색을 조화롭게 해서 한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처음부터 호남 사투리는 아니었다. ‘안녕’ ‘사랑해’ ‘세월아 잘 가거라’ ‘믿음’ 같은 단어로 작품을 3년 정도 만들다 호남 사투리로 작업을 시작했다. 중학교 선배인 전남대 예술대학 학장을 지낸 김종일 교수가 “자네는 사투리를 좋아하니까 사투리 그림 한번 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추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에 처음에는 ‘엄니’ ‘오매’ 등 간단한 단어에서 지금은 ‘오매 겅개가 업성 우짜까이’(아이고 반찬이 변변치 않아서 어쩌나) ‘고치폴아 돈사야 월사금 준당께’(고추를 팔아 돈을 만들어야 학교에 월사금을 낼 수 있다) 등 문장으로 발전했다. 그렇게 시작한 한글 그림이 150점을 넘었고 지난해 1월부터 작품들을 모아 ‘말-사투리그림’전을 박물관 3·4 전시실에서 열고 있다.
관람객들이 엄청 재미있어 할 정도로 반응이 아주 좋단다. 특히 호남이 고향인 관람객 중엔 무심코 내뱉던 사투리가 이런 예술 작품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에 감동을 느낀다는 이들이 많다. 관객들은 ‘오매 왔능가’ ‘아무것도 아닌디’ ‘꼴랑지’(꼬리) ‘싸살해야’(천천히 해라) ‘짠해서 우짜까이’(안타까워 어떻게 하지) 등의 작품을 좋아한단다. 김 관장이 가장 좋아하는 사투리는 ‘아무것도 아닌디’. “나이가 들수록 이 말이 가장 가슴에 와닿네요. 미워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이 세월이 지나면 다 아무것도 아닌데 젊었을 때는 금방 죽을 것처럼 매달리잖아요.” 그의 첫 한글 작품은 ‘우짜든지’(어쨌든지). 김 관장의 어머니는 “우짜든지 잘 살아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는데, 자식이 잘되길 바라던 어머니의 진심이 가득 담긴 그 말이 늘 가슴에 남아 있단다.
김 관장이 호남 사투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정년퇴직 때까지 수십 년 동안 몸담았던 초등학교 행정실 근무 때 만난 동료 덕분이다. 전남 장흥이 고향인 동료는 사투리를 굉장히 많이 썼는데, 생활용품을 모으다 보니 점점 잊히고 있는 옛 호남 사투리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이에 동료가 쓰는 사투리들을 공책에 적어 나가기 시작했고 교사들도 가세해 하나둘씩 알려 주면서 거의 사전 수준으로 사투리가 모였다.
#힘겨웠던 청춘을 딛고 일어서다
김 관장의 청춘은 매우 고달팠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생활전선에 뛰어든 그는 신문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돈을 벌기 어려웠다. 실의에 빠져 한때 남광주역 지하 탄약창고로 쓰이던 곳에서 노숙생활까지 한 그는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친척 소개로 광주의 간판집에 취업했다. 하지만 매일 도안만 하는 게 지겨워 한 달 만에 뛰쳐나왔고 광주관광호텔 도안실에도 취직했지만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군 제대 후 전기과를 졸업한 사촌 형이 차린 전업사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공사재료와 등기구 판매·설치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결국 1년 만에 그만뒀다. 그래도 이때 배운 기술이 먹고사는 수단이 됐다.
무작정 제주도로 건너간 그는 전기부품을 판매하는 행상을 시작했는데 당시 제주는 전압이 안 좋아 가정의 등기구가 자주 고장 나던 시절이라 꽤 많은 돈을 모았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부산의 등기구 안정기 생산공장에 취업했고 이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아이를 얻고 나니 공장 생산주임의 박봉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더군요. 희망이 보이지 않았죠. 그래서 고향에서 다시 인생을 개척해 보자고 마음먹었어요. 남들은 시골에서 다 도회지로 나가던 시절에 저는 반대로 시골로 간 거죠.” 운이 좋게 김 관장은 지인의 소개로 강진군의 한 초등학교 행정실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삶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정년퇴직을 초등학교에서 맞을 수 있었다.
그는 부산의 공장생활 때도 스케치북을 놓지 않을 정도로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어려웠던 시절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돈도 없기에 스케치북에 마음을 쏟아 냈어요. 그러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졌죠. 유일한 위안이자 탈출구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림을 놓지 않은 것이 큰 보람이 있네요. 이렇게 한글 그림을 그려 전시까지 할 수 있으니 말이죠.”
호남 사투리 그림은 빨리 그릴 때는 하루에도 한 작품이 끝나지만 2∼3개월씩 걸리기도 한단다. 끊임없이 한글을 변형하고 새로운 기법들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작업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작정이다.
박물관에 놓인 수많은 생활용품 중 김 관장이 가장 아끼는 물품이 두 가지 있다. 석유곤로와 재봉틀. “부산에서 아내를 만나 함께 살기 시작할 때 쓰던 석유곤로예요. 가난하던 시절의 애환이 모두 담겨 있죠. 어머니는 혼수로 가져온 재봉틀 하나로 동네 사람들 옷을 만들어 자식들을 모두 키워 냈어요. 남들에게는 하찮게 보이는 낡은 물건이지만 제겐 가장 소중하답니다. 이처럼 오래된 물건들은 한 사람이 힘들게 살아온 모든 시간이 담겨 있어요. 박물관을 찾는 많은 분이 물건들 틈에서 자신의 그때 그 시절 따뜻했던 추억을 발견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잠시나마 사랑하는 이들과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으니까요.”
김성우 관장은…
●1947년 전남 강진 출생 ●병영동국민학교·광주사대부중 졸업 ●1983년 제1회 개인전 ●소묘집 발간 ●광주 드로잉회원전 등 단체전 69회(2000∼2022) ●개인전 7회(2013∼2017) ●광주전남현대작가회 회원전 9회(2011∼2019) ●강진미협전(2021) ●남부현대미술협회 영호남교류전(2021) ●현 한국미협회원 ●현 와보랑께 박물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