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은 1995∼1996년 제3차 대만해협 위기 때도 직접적인 군사 충돌 위기가 고조된 바 있다.
1995년 6월 대만 독립을 주장하던 리덩후이(李登輝) 대만 총통(이하 당시 직책)의 미국 방문으로 미·중 사이에 3차 대만해협 위기가 촉발됐다.
리 총통은 모교인 미국 코넬대 연설을 이유로 미국 방문을 추진했다. 당시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비자 발급을 주저했다. 한 해 전인 1994년 리 총통은 미국에 가려 했을 때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비자 발급을 거부당해 노숙을 한 경험까지 있었다. 이번엔 미국 의회가 나섰다. 상원과 하원에서 압도적으로 리 총통의 방미를 허용하라는 결의를 채택한 것이다. 결국 비자는 발급됐고, 리 총통은 6월 코넬대 연설을 마쳤다.
중국은 이 사건을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굴복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이후 해·공군력을 중심으로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앞서 1차와 2차 대만해협 위기는 미·중이 수교를 맺기 전인 1954년과 1958년 각각 중국군이 푸젠성에 인접해 있는 대만 진먼다오(金門島)에 대규모 포격을 퍼부은 사건이다.
1954년 1차 대만해협 위기는 미국과 대만의 방어조약 체결이 논의되자 중국이 진먼다오에 포격을 가했고 미국과 대만은 그해 12월 공동방어조약을 체결했다.
1958년 중국이 진먼다오에 포격을 가하고 점령을 시도한 2차 대만해협 위기가 발발했다. 중국군은 8월23일부터 10월5일까지 포탄 47만발을 퍼부었고, 대만도 12여만발을 발사하며 대응했다.
미국은 직접 개입하지 않고, 대만이 전세에서 밀리지 않게 항공모함 등을 보내 대만의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고, 견인포와 미사일 등을 지원했다. 미국과 소련은 확전 방지를 위해 양측에 국지전 중단을 요구했고, 점차 포격이 줄어들었다. 포격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1979년 미·중이 정식 수교를 맺은 이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