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처럼 얽힌 기억의 바다… “한강 소설 읽고 영감 얻어”

시오타 지하루 개인전 ‘인 메모리’

캔버스 그림에 한계, 새로운 매체 찾아
실을 엮어 건축물 같은 설치공간 창조

소설 속 출산직후 아기 잃은 엄마 장면
아이 위해 준비했던 온갖 흰색 물건들
임신 6개월 유산했던 작가 경험과 통해

삶·죽음 관통하는 기억, 흰색실로 연결
“불안과 상실에 대한 애도·치유의 의미”

한국과 일본, 두 여성 예술가 영혼의 울림이 만났다. 2년 만에 국내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세계적인 ‘실의 작가’ 시오타 지하루의 신작 설치 ‘인 메모리(In Memory)’다. 시오타 지하루가 소설가 한강의 ‘흰’을 읽고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공간에 실을 엮어내 거대한 동굴처럼 만들어내는 시오타 지하루만의 설치 작품은 언제 어디서나 관람객의 사랑을 받곤 했지만, 이번 흰색 실로 엮은 설치 작품은 국내 관람객들에게 조금 더 특별하게 됐다. 많은 사랑을 받아온 또 다른 예술가 한강의 울림까지 더해져서다.

시오타 지하루 작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시오타 지하루 개인전 ‘인 메모리(In Memory)’가 열리고 있다. 조각16점, 평면 38점, 설치 1점 총 55점을 전시한다.

시오타는 교토세이카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나 평면에 한계를 느껴 199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고 신체를 활용한 퍼포먼스로 나아가 국제적 명성을 얻은 작가다. 기억과 트라우마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아, 몸은 죽어 없어지더라도 인간 내면의 의식은 영원히 이 우주 안에 녹아있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곤 한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덤에서 긴 잡초를 뽑으며 느꼈던 죽음의 공포, 이웃집 화재 후 집 밖에 내다 버린 불탄 피아노를 보고 느꼈던 강렬함, 두 번의 암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 마주했던 죽음 등이 그녀가 실존주의적 문제의식으로 한발, 한발 계속 나아갔던,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경험이다. 독일 베를린 중고 벼룩시장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조그만 유품들을 모으는 이유도 그 유품들 안에 유한한 신체 대신, 무한한 망자 내면의 의식, 기억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시오타는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실들을 엮어 팽팽하고 견고한 건축물 같은 설치공간을 창조해내는데, 그 섬세하면서도 장대한 대형 설치작품은 발표할 때마다 관람객의 탄성을 자아내곤 했다. 실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뭘까.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스무살 때부터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 외엔 다른 직업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림을 그렸는데 한계를 느꼈고 새로운 매체를 찾다가 실을 발견했다. 나는 실로 공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설치작품 ‘In Memory’. 가나아트 제공

검은색, 붉은색, 초록실로 공간에 그림을 그려 선보였을 때마다 숭고미를 자아냈지만, 이번엔 조금 더 특별하다. 그가 이번에 쓴 색이 흰색이기 때문이다. 흰색은 무엇으로도 쉽게 더럽혀질 수 있는 연약한 색이면서도, 마치 눈이 내릴 때 세상이 그렇듯 무엇이든 덮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색이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번 작품에 흰색 실을 쓴 이유, 또 제목을 ‘기억 속에서(In Memory)’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설치작품 ‘In Memory’. 가나아트 제공

“2020년쯤 다른 아티스트의 추천으로 한강의 소설 ‘흰’을 읽게 됐다. 임신 6개월에 양수가 터져 아이를 잃은 때였다. 의사가 ‘지금은 아이가 배 속에서 살아있지만 곧 죽을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이 컸다. 소설 ‘흰’의 표지에는 ‘죽지마, 제발 죽지마’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소설 속에서도 출산하자마자 아이를 잃는 엄마의 장면이 나온다. 또 아이를 위해 준비했던 온갖 흰색 물건들이 나온다. 물건을 사용했던 주인의 기억과 의식이 물건속에 영원히 남아 존재한다는 내 작품들과도 닮은 점이 많았고, 아이를 잃은 등장인물과 나도 비슷했다. 매우 감동받았다. 한강 작가를 따로 아는 사이도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강 작가가 와서 이번 작품을 봐주었으면 한다. 소설가도 남다른 느낌을 가지고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소연 미술비평가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쓴 글에서 그가 공간에 실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이렇게 평가한다.

전시전경.

“시오타는 특유의 수행적 설치미술과 존재와 죽음에 관한 물음에 마주해온 작가로, 마치 실을 잣는 듯한 시오타의 행위는 불안과 상실에 대한 애도와 치유의 동작이기도 하면서 숭고한 제의적 함의를 내비치기도 한다. 자신의 육체에서 실을 뽑는 것처럼 텅 빈 공간을 운행하며 그 궤적을 실로 가득 뒤덮는 퍼포먼스적 행위는 현실의 공간을 굴절시켜 이처럼 다중복합적 경험을 불러온다. 보이지 않는 연결된 삶의 이중적 표상은 그가 삶과 죽음 혹은 존재와 부재를 이분법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 경계를 유연하게 교차해 행위 궤적을 남김으로써 나를 초과한 장엄한 시공간의 현전과 마주하게 되는 사유의 실체다.”

작가는 설치작업을 하기 전에 공간을 직접 방문하고, 그 공간에서 받은 영감으로 스케치 드로잉을 한 뒤, 직접 실을 엮는다고 한다. 이번에도 실의 장력을 버틸 수 있도록 별도 벽 공사를 3일간 했고, 12일 동안 작가가 실을 직접 엮어냈다고 한다. 한쪽 팔에는 실타래를 낀 채, 한 손으로는 열두날 동안 실을 뽑아낸 끝에, 그가 잃은 아이, 두 번의 암 투병, 그가 베를린 벼룩시장에서 사 모은 유품들에 담긴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배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8월2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