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곳곳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각국이 수난(水難)을 겪고 있다. 이란, 파키스탄 등 중동과 동아시아에는 물폭탄이 쏟아져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국 중동부도 최근 비가 쏟아져 홍수 피해가 잇따랐다. 호주 동부지역에는 지난달 때아닌 겨울철 폭우로 시드니를 비롯한 뉴사우스웨일스주 주택가가 물에 잠기고 고립됐다.
우리나라도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80년 만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면서 지하철이 멈추고, 차량 수천 대가 침수되는 등 기후재앙을 마주하고 있다.
8일 서울 서초, 강남, 동작구 등 강남권에는 7월 평균 강우량(414.4㎜)에 달하는 비가 하루 만에 쏟아져 거리 전역이 침수되는 등 물바다를 이뤘다. 기상청은 10일까지 수도권과 강원도에 최대 300㎜ 비가 더 내릴 것으로 전망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각국 속수무책
기후변화로 인해 예상을 넘어선 빗줄기가 쏟아지면서 세계 각국은 최근 극심한 피해를 보았다.
이례적으로 강하고 긴 우기가 이어진 파키스탄에서는 지난 한 달 동안 30년 평균 강수량의 두 배가 넘는 비가 내려 수백명이 숨졌다. 지난 6일(현지시간) 익스프레스 트리뷴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파키스탄 국가재난관리청(NDMA)은 지난 한 달 동안 홍수로 최소 549명이 사망하고 4만6200채가 넘는 가옥이 피해를 봤다고 밝혔다. 가장 많은 비가 내린 발루치스탄주는 700㎞ 이상의 도로가 침수로 유실되면서 일부 지역이 고립돼, 식량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란도 지난달 일주일간 계속된 폭우로 인명피해가 속출했다. 이란 국영 IRNA 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23일부터 30일까지 이란 31개 주 가운데 21개 주가 폭우로 인해 홍수·산사태가 발생했고, 최소 82명이 숨졌다. 이란 적신월사는 60개 도시 516개 마을이 홍수 피해를 봤다고 전했다. 폭우로 인해 거처를 잃거나 당국의 지원을 받은 이재민은 6200명으로 집계됐다. 이란 농업부는 홍수로 약 60조리알(약 2600억원) 규모의 농작물 피해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미국 켄터키주와 미주리주 등 중동부 지역도 강수 피해가 컸다. 앤디 버시어 켄터키 주지사는 지난달 30일 “애팔래치아 고원지대에서 발생한 홍수로 현재까지 모두 25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어 “시신 수습까지 앞으로 수주가 걸릴 것으로 우려한다”며 “현장은 말 그대로 완전히 파괴됐으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지경”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25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는 하루 최대 300㎜가 넘는 기록적 폭우가 쏟아져, 기존 최고치인 1915년의 174㎜를 경신했다.
호주에서는 지난달 2일부터 나흘간 최대 도시 시드니를 비롯한 동부지역에 집중 호우가 이어졌다. 곳곳이 침수되면서 주민 8만5000여명이 긴급 대피에 나섰고, 군 병력까지 배치됐다. 이 기간 호주 동부에 내린 비의 양은 700㎜에 달해 시드니에서 보통 한 달 반 동안 내리는 비가 나흘 동안 한꺼번에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상기후는 인간 탓…“지구 온난화로 수백만 명 희생”
전문가들은 폭우 등 기후재난은 대부분 인간활동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입을 모았다.
8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의 기후 정보 웹사이트 ‘카본 브리프’(Carbon Brief)가 수집한 1850년부터 올해 5월 사이의 이상기후 현상 504건에 대한 연구 보고서 400여개를 분석한 결과 전체의 71%에서 인간이 영향을 미친 사실이 확인됐다. 인간활동의 영향으로 발생 확률이 높아지거나 기후변동의 폭이 커진 사례가 전체의 3분의 2에 육박했다는 것이다.
특히 폭염은 전체 152건 중 93%가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됐다. 가뭄은 81건 중 55건(68%), 호우와 홍수는 126건 중 71건(56%)이었다.
가디언은 “지난 30년간 여름철 고온 때문에 발생한 인명피해의 3분의 1은 인간이 초래한 지구온난화의 직접적 결과로 수백만명이 희생됐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체 504건 가운데 북미와 유럽, 일본의 극심한 폭염과 시베리아 기온 급등, 호주 해수온도 상승 등 12건은 인간이 전 세계에 걸쳐 기후 불안정을 초래하지 않았다면 사실상 있을 수 없었던 현상들로 여겨진다”고 강조했다.
영국 임피리얼칼리지런던대 소속 기후과학 전문가 프레디 오토 박사는 지난해 북미와 태평양 지역을 뜨겁게 달궜던 ‘열돔 현상’을 지목하며 “해당 현상은 기존 (최고기온) 기록을 5도나 웃돌았다.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올해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북반구 국가를 동시다발적으로 덮친 폭염도 유사한 진행양상을 보인다고 말했다.
◆기상청 “지구 온난화는 국내 기온 상승뿐 아니라 폭우도 일으켜”
우리나라 기상청도 최근 탄소 배출이 현 수준으로 이어지면 홍수 발생 가능성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이 연구에 따르면 60년 뒤 국내 폭우 강수량은 지금보다 최대 70%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기상청과 APEC 기후센터(APCC)가 지난 6월 공개한 국내 하천 유역별 극한 강수량의 미래 변화 분석 결과에 따르면 고탄소 시나리오시 60년 뒤인 21세기 후반(2081~2100년) 전국의 평균 극한 강수량은 지금보다 53%(70.8~311.8㎜) 급증할 것으로 추정됐다. 현재는 일 누적치 기준 187.1~318.4㎜인데, 60여년 뒤엔 여기서 수십, 수백㎜ 폭우가 더 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이대로면 최근 수도권과 강원지역을 강타한 폭우에 두 배 수준인 하루 500~600㎜ 넘는 비가 특정 지역에 쏟아지는 일이 현실화된다. 이번 연구는 전국을 한강·낙동강 중심의 26개 권역으로 쪼갠 뒤, 100년에 한 번 쏟아지는 ‘대형 폭우’의 양이 기후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할지 따졌다. 기후변화 시나리오는 고탄소(현재와 비슷하거나 좀 더 높은 탄소 배출), 저탄소(화석연료 사용 최소화하고 탄소 배출 획기적 감축) 둘로 나눴다.
고탄소 경향이 이어지면 2081~2100년 극한 강수량 증가 폭이 현재 대비 50%를 넘는 권역은 26곳 중 16곳에 달한다. 전반기(2021~2040년) 1곳, 중반기(2041~2060년) 7곳과 비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폭우 지역이 크게 늘게 된다. 특히 동해 인근 지방과 제주 권역의 폭우 증가가 가장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강 동해 권역(영동 지방 등)의 강수량은 73%, 낙동강 동해 권역(경북 동해안 등)은 69% 뛸 것으로 예측됐다. 제일 남쪽에 있는 제주 권역은 21세기 중반기에 이미 78% 증가한다는 예상이 나왔다.
반대로 화석연료 사용을 대폭 줄이면 극한 강수량 증가 폭이 확연히 떨어진다. 21세기 후반 극한 강수량 증가폭이 29%(18.9~136㎜) 정도에 그친다는 예상이다.
김선태 APCC 선임연구원은 “탄소중립 효과로 지구온난화 진행 속도가 더뎌지면 극한 강수량도 줄고 홍수 발생 가능성도 낮출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원래 강수량은 지구 온난화와 정비례로 나오기 어려운 편이다. 그런데 국내에선 온난화가 진행될수록 지역별 극한 강수량 증가 폭이 확연히 올라간 게 예상외의 결과였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