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 살 평생 맞아온 비보다 어젯밤 30분 동안 맞은 비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지난 8일 밤 서울 강남구 개포동 판자촌 ‘구룡마을’에서 35년째 거주해 온 조모(70)씨는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은 뒤 여느 때처럼 여유롭게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빗줄기가 거세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빗물이 집 안으로 쏟아지듯 들이쳤다. 이날 강남 지역 강수량은 시간당 100㎜ 이상을 기록했다.
남편은 거동이 불편해 조씨 혼자 냄비와 물통을 들고 거실에 차오르는 물을 밖으로 퍼 날랐다. 그래도 물이 줄지 않자 밖으로 뛰어나가 흙과 돌, 모래주머니 등을 닥치는 대로 주워 담벼락 틈을 메웠다. 그렇게 30분 동안 맞은 비는 조씨가 평생 맞아온 것보다 많게 느껴질 정도로 야속했다.
조씨는 집이 잠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밤새 빗물을 퍼냈다. 지하철역에서 청소일을 하는 조씨는 지저분해진 집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채 9일 아침 일찍 출근했다. 그의 직장 역시 전날 들이친 빗물과 쓸려 내려온 쓰레기가 잔뜩 있었다. 오후 늦게 퇴근한 조씨는 곧장 대피소가 마련된 강남구 구룡중학교 체육관으로 향했다. 전날 폭우로 집이 물에 잠기거나 무너진 구룡마을 이재민들이 지친 모습으로 구호텐트를 지정받고 있었다.
조씨는 “어제는 밤을 새워 빗물을 퍼냈지만 계속 그럴 수 있나요. 비가 계속 온다는데 일단 피해야지.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할지 참 막막하네요”라고 하소연했다.
서울·수도권 등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115년 만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면서 곳곳에서 피해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은 강남·서초·관악·동작구 등 남쪽 지역을 중심으로 비가 집중적으로 내려 큰 피해를 입었다. 비가 내리는 양은 빈부를 가리지 않았지만, 피해 정도는 ‘어디에 사는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폭우 역시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을 향해 매섭게 파고들었다.
폭우로 인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이 무너진 것은 조씨네뿐만이 아니다. 서울 강남 지역에 큰 피해를 남긴 폭우는 지대가 낮은 데다 대모산과 구룡산을 뒷산으로 끼고 있어 빗물이 계곡물처럼 흘러내린 구룡마을 단층 주택에 더 가혹했다. 밤사이 집이 물에 잠기거나 무너지고, 전기와 수도가 끊겨 구룡마을 이재민 170여명이 대피소를 찾았다. 대한민국 최고 부촌으로 꼽히는 강남구에 위치했기에 폭우가 쓸고 간 구룡마을의 참상은 더욱 비참했다.
전통시장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10일 오전 기자가 찾은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은 수해 복구 중인 상인들의 한숨 소리로 가득했다. 시장 길목 한복판엔 빗물에 잠겨 못 쓰게 된 냉장고와 집기, 잡동사니가 널려 있어 통행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장이 비탈길을 따라 자리하고 있어 저지대에 있는 시장 초입 가게들의 피해가 컸다. 상인 대다수가 가게 앞에 내놓은 진열장 등을 고압 세척기로 씻는 데 한창이었다. 일부 가게에서는 젖어서 한데 뭉친 지폐를 한장 한장 뜯어 말리고 있었다.
복구 작업을 시작도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있는 상인들도 있었다. 시장 내 한 건물 지하에서 노래방을 운영하고 있는 60대 이모씨는 건물 입구에 망연자실한 채 앉아 있었다. 이씨는 “천장까지 빗물이 차올랐는데, 호스가 닿지 않아 물을 빼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가게 차린 지 1년도 안 됐는데…”라며 깊은 한숨을 토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8일부터 내린 비로 실종 피해가 1명 늘어 이날 오후 6시 기준 인명피해가 16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사망 10명(서울 6·경기 3·강원 1), 실종 6명(서울 3·경기 3), 부상 19명(경기)이었다. 이재민은 570세대 723명이 발생했으며, 주택·상가 3716동이 침수됐다.
한편,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중대본에서 폭우 피해 상황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생활이 어려운 분들, 몸이 불편한 분들이 자연재해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며 “피해를 입고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취약계층이 없는지 세심하게 살피고, 일상에 신속하게 회복할 수 있도록 잘 살펴 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윤 대통령은 또 산사태로 옹벽이 무너져 주민들이 대피한 사당동 극동아파트 현장을 방문해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안전하다는 확실한 진단이 나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당부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한국 수도권을 중심으로 발생한 기록적인 호우로 소중한 생명을 잃고 시민 생활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것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낀다”며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을 대표해 희생된 분들과 유족에 대해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고 일본 외무성이 전했다. 기시다 총리는 이어 “피해를 본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서울을 비롯해 피해를 본 지역이 하루빨리 재해 전의 모습을 되찾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