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건전성 확보를 내세운 윤석열정부가 내년 본예산의 총지출 규모를 올해(2차 추가경정예산 포함) 지출보다 축소하기로 했다. 코로나19 사태 등을 거치면서 자리 잡은 확장재정 기조 탓에 나랏빚이 대폭 증가한 만큼, 당장 내년부터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를 위해 정부는 대대적인 지출 구조조정, 장차관급 고위 공무원 보수 삭감 등을 통해 “줄일 수 있는 예산은 다 줄이겠다”고 밝혔다. 다만,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등 내년부터 각종 감세 조치가 예고된 데다 경기 침체가 우려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안전망 관련 예산이 축소될 경우, 취약계층의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추 부총리 “내년 본예산, 올해 추경 포함 규모보다 대폭 낮은 수준”
14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전날 고랭지 배추 재배지인 강원도 강릉 안반데기를 방문한 자리에서 “최근에는 다음 해 본예산을 편성할 때 그해 지출보다 증가한 상태에서 예산을 편성했으나 내년 본예산은 올해 추경을 포함한 규모보다 대폭 낮은 수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2차 추경을 포함한 총지출(679조5000억원)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예산이 편성된다는 뜻이다. 다음 해 본예산 총지출이 전년 전체 지출보다 작아지는 것은 2010년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 주재한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정부가 내년부터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3.0% 이내로 관리하겠다고 밝힌 만큼 총지출 증가율은 5% 중반 수준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올해 본예산 총지출 규모인 607조7000억원을 기준으로 증가율을 5%로 설정하면 내년 총지출은 638조1000억원, 6%로 잡으면 644조2000억원 수준이 된다.
◆나랏빚 증가세에 ‘재정 다이어트’…사회안전망 예산 축소 등 부작용 우려도
정부가 ‘긴축 모드’에 들어간 건 나랏빚 증가세가 심상찮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 첫해인 2017년 국가채무는 660조2000억원이었지만 올해 2차 추경 기준 연말에 나랏빚은 1068조8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도 2017년 36.0%에서 올해 말 49.7%로 급증할 것으로 예측된다.
정부는 전방위적으로 재정 다이어트에 나설 계획이다. 우선 올해 기준 300조원 정도로 편성된 재량지출의 10% 정도를 절감하는 등 대대적인 지출 구조조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이를 위해 1205개 민간 보조사업 중 440개를 점검해 이 중 61개 사업을 폐지하고, 191개 사업은 감축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장차관급 이상 고위 공무원의 임금은 동결하되 10%를 반납하도록 하고, 국유재산 중 유휴·저활용 재산 16조원을 향후 5년간 매각할 예정이다.
하지만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등으로 향후 5년간 60억원 정도의 세수 감소가 예상되는 가운데 ‘긴축’으로의 급속한 전환이 여러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부 총지출 중 사회복지 분야가 32.1%(195조원)로 가장 비중이 큰 만큼 각종 사회안전망 관련 예산이 축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적으로 경기 침체 우려가 짙어지면서 한국의 내년 경제성장률이 2.0%(한국개발연구원 설문조사)까지 쪼그라들 것이란 예측이 나오는 상황에서 복지 예산 축소는 취약계층의 위기를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강병구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재정 지출의 효율화는 필요성이 있지만 경기 침체 국면으로 접어드는 가운데 급격하게 재정을 축소시키면 재정의 경기 안정화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대기업, 자산가, 고소득층에 대한 감세 정책이 ‘부자감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서 “이렇게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우리 사회에서 여유 있는 계층이나 집단이 세금을 내서 취약계층을 위한 사회안전망, 고용안전망 관련 재원을 두텁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은 ‘빅스텝’에 정기예·적금으로 몰리는 시중 자금…‘역 머니무브’ 가속화
지난달 한국은행의 사상 첫 ‘빅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 이후 은행 정기예·적금에 시중 자금이 몰리고 있다. 주식·부동산 시장 침체 등으로 위험자산에서 빠져나온 뭉칫돈이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고 안정성이 담보되는 정기예·적금에 집중되는 ‘역(逆) 머니무브’가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시중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정기예금 잔액은 지난 11일 기준 718조9050억원으로 지난달 말보다 6조4599억원 증가했다. 정기적금 잔액도 같은 기간 4061억원 늘어난 38조5228억원으로 집계됐다. 5대 은행 정기예·적금이 지난달 28조56억원 늘어난 것을 합하면 42일 만에 34조8000억원 넘게 급증한 셈이다. 이는 올해 상반기 5대 은행 예·적금 증가액(32조5236억원)보다도 큰 규모다.
한은 빅스텝 이후 주요 시중 은행들은 예·적금 금리를 최대 0.90%포인트 인상했다. 과거에는 한은 기준금리 인상 이후 수신(예금) 금리 상향 조정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최근 예금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은행들은 인상 당일 혹은 다음날 바로 수신 금리를 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25일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회의에서 기준금리를 현 2.25%에서 0.25%포인트 올리는 ‘베이비스텝’만 밟아도 시중 은행 예금금리 연 4%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날 은행연합회 공시에 따르면 5대 은행이 판매하는 1년 만기 정기예금과 적금 금리(우대 적용 단리 기준) 상단은 각각 3.60%, 5.50%였다.
◆‘이상 해외송금’ 8조5000억원 규모…가상화폐 거래소 차익거래·자금세탁 관련 가능성도
국내 은행을 거친 이상 해외송금 액수가 약 8조5000억원(65억4000만달러)에 달한다는 금융당국의 발표가 나왔다.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의 ‘김치 프리미엄’을 노린 차익거래나 자금세탁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큰 자금이어서 금융감독원은 관련 은행에 대한 검사를 확대하기로 했다.
금감원은 이달 12일 기준으로 우리‧신한은행에서 확인한 이상 해외송금 액수(33억9000만달러)와 다른 은행에서 자체 점검으로 확인한 액수(31억5000만달러)를 합하면 전체 의심거래는 65억4000만달러라고 밝혔다. 이는 원래 예상한 약 7조원(53억7000만달러)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다.
금감원은 우리·신한은행에 대해서는 이달 19일까지 검사를 끝내고, 이상 해외송금 의심거래가 파악된 여타 은행에 대해서는 추가 검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은행들은 자체 점검에서 △가상자산거래소 연계계좌 운영 은행과 입금 거래가 빈번하거나 △다른 업체와 대표가 같은 등의 업체 실재성이 의심되는 사례를 발견했다. 또 △거래당사자 외 제3자에게 송금할 때 한국은행에 신고하도록 한 법규를 위반하거나 △업체 업력과 규모 대비 대규모 송금을 한 사례도 파악했다.
금감원 외에 검찰과 국가정보원 등 수사기관도 이번 사건을 주시하고 있다.
대구지검은 최근 특정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과 외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이상 해외 송금에 관여한 유령 법인 관계자 3명을 구속했다. 서울중앙지검 국제범죄수사부도 금융정보분석원(FIU)과 금감원으로부터 이상 외화거래 관련 자료를 넘겨받아 자금 흐름을 추적 중이다. 김치 프리미엄을 노린 차익거래를 넘어 가상자산 거래소를 통한 자금세탁 혹은 다른 불법 범죄자금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있어 국정원까지 나서서 이상 해외송금 관련 자금 흐름을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